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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혁명 – 나무위키:대문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은 서기 1894년 동학(현 천도교의 전신)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민란으로, 동학 농민 운동, 동학 농민 전쟁, 갑오 농민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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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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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혁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동학 혁명(東學革命), 동학 운동(東學運動),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으로 불리기 시작한 동학난(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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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0/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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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운동(東學運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되었다.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국가재정도 이 지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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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6/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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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1894 – 우리역사넷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고종 31)의 제1차 농민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주도한 무장개혁 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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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1/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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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19세기말 조선 민중의 반역 – 오늘보다

동학농민운동은 19세기말 세계사에서 그 유례가 없는 최대 규모의 민중운동이었으나 조선왕조 지배층의 무능,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 그리고 신분제라는 기득권 수호에 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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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odayboda.net

Date Published: 5/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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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NIE] 동학농민운동은 왜 대일 무장투쟁이 됐나 – 중앙일보

올해는 동학 농민 운동(1894)이 일어난 지 120년 되는 해다.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이 중심이 돼 부패한 정부에 맞서 봉건적 사회 질서를 바꿔보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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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3/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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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도 항일운동이다 – 한겨레

[전국 프리즘] 박임근 | 전국부 선임기자 오는 5월11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다. 128년 전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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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3/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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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운동 – 네이버 블로그

동학농민운동은 종교운동을 표방하는 교주 최시형과는 다르게 독자적인 성향으로 활동하는 세력에 의해 일어났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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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2/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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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건 동학농민운동 한편으로 끝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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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동학 운동

  • Author: 역사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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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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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혁명

동학난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영화에 대해서는 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영화에 대해서는 동학난 (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갑오농민전쟁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소설에 대해서는 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소설에 대해서는 갑오농민전쟁 (소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1], 동학 혁명(東學革命), 동학 운동(東學運動),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으로 불리기 시작한 동학난(東學亂)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189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2]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못마땅히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석방되었으나 민씨 계열의 관군에 의해 살해된다. 그밖에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들은 남접의 거병에 쉽게 호응하지 않다가 그해 9월의 3차 봉기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개화파 지도자이자 망명정객인 윤치호는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3]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4]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배경 [ 편집 ]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일본 세력과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의를 내세운다) 깃발 동학농민군 측에서 사용한(斥倭洋倡義, 일본 세력과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의를 내세운다) 깃발

최시형의 인장

1882년 이후의 각종 사회 혼란과 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도화선이 되어 농민운동을 일으켰다.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난다.[5]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청나라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5] (톈진 조약을 파기시킬만큼) 민씨 정권에서 청나라 군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진압하자, 일본은 일본대로 청나라가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화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5] 급기야 그것은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5]

개요 [ 편집 ]

고부 봉기와 자진 해산 [ 편집 ]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탐학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곧 중앙정부의 탐관오리들에 대한 분노로 향했다.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5] 대원군은 이 기회를 이용, 동학농민군과 접선하여 손자인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1886년 흥선대원군은 민씨 정권이 〈조약〉을 체결하자 불만을 품은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장남 이재면(李載晃, 고종의 형,완흥군/흥친왕)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 세력과도 연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실현되지 못하였다.[6] 동학군 중에는 전봉준과 같이 대원군의 문하에 출입하던 인물들도 있었고, 폐정개혁과 대원군 추대, 민씨 외척세력 척결과 개화파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도 강력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은 민씨 정권의 부패정치와 지방에 파견된 탐관오리들에 대한 반발을 주목했다.

한편 정부에서 안핵사(按覈使) 이용태를 보내 이들을 위로하고 탐관오리 처벌을 약속하자 고부군의 동학군은 해산하였다.(하지만 안핵사 이용태 마저 백성들을 배신함.)

2차 봉기(전주성 점령) [ 편집 ]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첫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였다. 이용태의 강경책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태인 대접주 김개남, 무장(茂長) 대접주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 등으로도 불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 손화중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궐기한 뒤 전주성을 점령한다.

한편 동학농민군은 고부의 황토현(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에서 4월 7일(양력 5월 11일) 전주감영군을 격파했다. 이에 크게 놀란 조정에서는 전라도병마절도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4월 23일(양력 5월 27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4월 27일(양력 5월 31일)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7]

1894년 3월 21일 고부에서 봉기한 지 석 달,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청, 일에게 군사주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갑오개혁의 시작되는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8]

전주화약과 청일 양국군의 주둔 [ 편집 ]

사태가 확산되자 고종과 왕비는 당황해하였다.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톈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9]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불법으로 조선 궁궐 경복궁을 침범(갑오왜란) 명성황후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9]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제1차 김홍집내각, 즉 친일 내각은 일본공사 오토리의 입김 아래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다. 이것이 조선정부와 동학농민군과 맺은 자주적인 개혁 전주화약을 간섭한 친일내각의 갑오개혁이다.[8]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전주화약 당시에 설치된 교정청을 폐지 이후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교정청 출신인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9]

3차 봉기와 실패 [ 편집 ]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전쟁은 두 달 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9]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실시하였다.[9] 이 때문에 해산되었던 동학농민군이 외세배격을 기치글 내걸고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전쟁을 감행했다.[9]

봉기한 동학농민군 제1대는 전봉준의 지휘 하에 공주성으로 다가들었고, 제2대인 김개남의 지휘하에 청주병영으로 진격했다. 농민군의 최종 목표는 서울로 쳐들어가 부패한 정치가들과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는 데 있었다. 교조신원운동에서 고부 봉기, 그리고 제2차 봉기까지 전봉준과 농민군은 오직 그 날을 위해 달려갔다.[8]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그 해 12월 패배하여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9]

교조 신원운동과 대원군의 개입 [ 편집 ]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동학도들은 동학도들 대로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편 1893년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10]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10]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10]

고부 봉기 배경 [ 편집 ]

1892년 전봉준이 살던 고부군에 조병갑이란 이가 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이 형별을 가하였다.[11]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값을 받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 고부군수 조병갑은 아버지의 선정비 또는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임지인 고부군 군민들에게 세금액수를 인상하여 거둬들였다.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천 냥의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11] 한편 조병갑은 중앙 조정에도 뇌물을 바쳤다. 중앙 조정에 바치는 뇌물은 의례적인 것으로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군수나 현감, 부사, 관찰사는 얼마 못가 파직되거나, 정부에 막대한 돈을 헌납하는 자를 군수나 현감, 부사, 감사로 임명하면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금이 인상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이자 당시 훈장이던 전창혁은 농민들의 요청에 따라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심하게 매를 맞고는 귀가한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11]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11] 이어 전라북도관찰사에게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11] 이어 일부 농민과 동학도들은 무기와 화약을 준비한다.

이에 분격한 농민들은 훈장인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교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입경하여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 그는 농민 운동 당시 남접 소속 동학군 부대 지휘관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1893년 12월부터 1894년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긴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은 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한다.

대원군 세력의 개입 [ 편집 ]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하자 대원군의 귀에는 농민들이 대원군을 부르짖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대원군은 밀사를 파견하여 농민군 지도부와 접촉했다.[12] 1894년 2월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이용하기로 하고 교섭을 시도한다.

개혁 운동 [ 편집 ]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의 제1차 농민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주도한 무장개혁 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개혁하자는 운동이다.

동학의 분열 [ 편집 ]

동학교조 최제우가 잡혀 죽은 후 동학은 크게 두 파로 갈라졌다. 하나는 최시형 계열이고 또 하나는 서장옥 계열이었다.[13] 그러나 이 두 파벌 모두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법포는 다시 최시형, 손병희 직계인 북접과 다시 전봉준, 김개남을 지도자로 하는 남접으로 나뉘게 된다. 서장옥은 불교의 승려였다가 동학의 초기 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던 인물이다. 서장옥이 불교 승려였던 인연으로 동학 농민군이 거병할 때는 산사의 승려들 동원이 가능하였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의 《오하기문 梧下記聞》에 따르면 “처음 동학에서는 그 무리를 포(布)라고 불렀는데 법포(法布)와 서포(徐布 또는 西布)로 나뉘었다. 법포는 최시형을 받드는데 법헌이라는 최시형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서포는 호서 혹은 서장옥(서인주)의 성을 따서 서포라 불렀다. 서장옥은 수원 사람으로 최시형과 함께 교조 최제우를 따라 배웠다. 최제우가 죽자 각기 자기 도당을 세워 서로 전수하면서 이를 포덕이라 하였다.[13] 이들은 동학이 궐기할 때 서포가 먼저 일어나고 법포가 뒤에 일어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서포는 또 기포(起布)라 하고 법포는 좌포(坐布)라 불렀다. 전봉준이 주동하여 일어날 적에는 모두 서포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14] 남접은 서포의 한 갈래였다.

동학농민전쟁 후 살아남은 손병희는 최시형의 둘째 사위이자 후계자로, 최시형 사후 동학은 다시 내분을 거듭하다가 천도교와 일진회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동학 농민군의 파벌 [ 편집 ]

동학 농민군은 남접과 북접, 서포(또는 호서남접)의 세 갈래의 파벌이 있었다.

남접 [ 편집 ]

남접은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군으로 처음 거병한 집단을 말한다. 남접은 접주인 전봉준, 무장 대접주인 손화중 및 태인 대접주인 김개남을 최고 지도자로 나뉘어 있었다. 전라남도, 전라북도에 영향을 미쳤으며 지도자들은 현지 출신 접주들 보다는 주로 고창, 태인, 전주, 옥구, 금구 등 전라북도 북부와 서부 출신들이 많았다. 경상북도의 성주군, 칠곡군, 경상남도 하동군 지역도 남접의 세력권이었다.

전주화약이후 전봉준은 호남우도, 김개남은 호남좌도를 호령하였다. 사진은 김개남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될 때의 모습

온건파인 무장 대접주 손화중은 같은 온건파인 전봉준에게 자신의 조직을 통솔하도록 맡겼고, 강경한 혁명파인 김개남은 혁명을 함께 하면서도 때론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전주화약 이후에는 전봉준이 금구에 대도소를 두고 전라우도를 호령하고,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를 두고, 전라좌도를 호령하면서 [전봉준] 과 달리 독자적 행동을 하였다.[15]

“ 김개남은 내가 왕사(王事)에 협력하자고 권고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처음에는 상의한 바가 있었지만 끝에는 결단코 상관하지 않았다.[16] ” — 전봉준,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김개남은 전봉준에게 호응하면서도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올리는 것과, 근왕주의적인 사상을 가졌던 점을 못마땅히 여겨, 전봉준과 수시로 충돌하였다. 이는 전봉준이 체포된 뒤 일본 영사관 형문장에서 진술한 공소장에도 일부 언급되고 있다.

북접 [ 편집 ]

북접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충북 이북 지방의 파벌로 법포 또는 좌포라고도 불렸다. 최제우의 정통 직계를 자처하는 집단으로 대도주인 최시형과 손병희, 손천민 등이 속했다. 충청북도 보은군, 논산군 일대에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에 동학의 주요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진술에 따르면, 최시형은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이다 라 규정하고, 동시에 남접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17]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18] 남접과 달리 북접은 중농 이상이 많아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18] 북접의 목적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의 포덕 자유 허용이 목적이었다. 북접은 최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고, 흥선대원군과의 연결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남접이 3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18] 그러다가 그해 9월 최시형이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을 하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서포 또는 호서남접 [ 편집 ]

최제우 사후 동학은 법포와 서포로 나뉘었다. 법포는 최시형을 받드는데 법헌이라는 최시형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서포는 서장옥을 받든다.[13] 서포는 다른 이름으로 호서남접으로 불렸다.[19] 충청북도 청주와 충청남도 지역에 위력을 떨쳤다.

서포에는 북접에서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파면당한 이들 일부가 가담해 왔는데, 남접의 근거지인 전라도 보다는 서포가 활동하는 충청남도 아산, 보령 지역이 더 가까운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 동학 농민군의 영향력은 황해도 일대, 경상북도 성주군과 칠곡군, 고령군, 경상남도 하동군 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구호와 거사 목적 [ 편집 ]

동학 농민군이 거병한 대의는 부패관리 축출과 탐관오리 처벌이 목적이었다. 동학농민군의 구호는 ‘보국안민’, ‘제폭구민’ 등으로 유교적인 충군, 애민 사상을 담고 있었다.[20]

1894년 가을에 이르러 동학 농민군은 항일의병적인 성격으로 변화한다. 이를 두고 서울대학교 교수 유영익은 그해 가을의 동학 봉기를 “일본군을 쫓아낼 목적으로 궐기한 구한말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 의병운동이었다.[20]”라고 하였다. 부패한 집권층 타도, 민씨 정권 축출을 목적으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항일 의병전쟁, 독립운동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봉기 직전 [ 편집 ]

1893년 말부터 1894년 1월 초, 거사를 앞두고도 남접 내부에서도 거사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쉽게 단안을 내리지 못했다. 남접의 실력자인 손화중 역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전봉준은 ‘이런 저런 부패가 있는데 어찌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우리 국민으로써 어차피 피해다니면서 교를 형성하고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차에 이 기회에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것 아니요. 취지가 맞다고 생각하면 다같이 동참해서 힘이 되어 주시고, 접주님이 주관을 해주시요.[21]’라고 하였다.

그런데 손화중은 쉽게 승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은 시기 상조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더 있으면 자연히 그럴 때가 닥칠 수 있다. 그때를 맞춰서 해야지 지금 해서는 안된다’하고 전봉준을 설득하였다.[21] 농민 운동 직전에 거사에 동학 내 강경파였던 남접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은 김개남 등의 개남국왕설 소문이나 전봉준 일파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한 것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을 압박하자, 최시형 등은 처음에는 협상론인 화전론(和戰論)을 펼치다가, 마침내 현실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북접을 전봉준의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시켰다.[17] “인심이 즉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 고로 너희들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 이로써 교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도의 큰 뜻을 실현시키라!” 이로써 손병희 등이 이끄는 북접이 남접과 힘을 합쳐 봉기[17] 에 가담했다.

결과와 전개 과정 [ 편집 ]

제1차 봉기 [ 편집 ]

1차 봉기 창의와 사발 통문 살포 [ 편집 ]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사발통문(격문)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22]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관의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2]

전봉준은 그 전날 밤에 태인의 최경선과 함께 3백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40리 길을 행군하여 말목장터에 미리 당도해 있었다.[22] 대열을 가다듬은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그 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22]

첫 전투의 최고 지도자는 전봉준 외에도 남접에는 손화중이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고, 서포에는 서장옥이 최고 지도자였다. 무장 기포에서 황토현 전투까지는 손화중 등 각 접주들이 연합해서 싸웠는데, 황토현 전투 이후 손화중은 전봉준을 대장군으로 임명한다. “전투에서는 당신이 다 관장을 하고, 그 자문은 나한테 얻어서 시행만 하시오.[23]”라고 했다.

고부군청 점령과 안핵사 파견 [ 편집 ]

이리하여 농민들은 전봉준을 선두로 수백 명이 1894년(고종 31) 2월 15일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갔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줄행랑을 놓았고, 그들은 관아를 습격·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하였다. 또한 무력 봉기와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의 거병 반대와, 농민군에 대한 초기의 방관적 대응도 작용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을 생포하는 일은 실패하였다. 조병갑은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전주감영으로 피신하고 없었기 때문이다. [22] 고부 관아가 농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용산현감 박원명을 신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22]

조선 말기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개는 조정에서 안핵사(按覈使)를 보내면 평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화약을 청했고 동학 농민군 대표들과 면담 후, 동학 농민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고 동학 농민군은 자진해서 해산한다. 이것이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으로, 고부 봉기, 1차 봉기, 정월 봉기 등으로 부른다.

제2차 봉기 [ 편집 ]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과 재궐기 [ 편집 ]

그러나 머지 않아 안핵사 이용태는 위 사건을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일반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혹독히 탄압하였다. 이에 고부의 상황은 바뀌게 된다. 이용태의 탄압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무장(茂長)의 김개남,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 등으도 불리는 ‘제2차 동학 농민 운동’이다.

이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세를 확대하여 백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동학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자, 그 해 3월 전봉준은 인근 각지의 동학교도들에게 통문을 보내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일시에 1만으로 불어났다.[22] 집결한 교도들에 의해 농민군의 동도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 김덕명과 오시영을 동도대 총참모, 최경선을 총솔장, 송희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삼고 조직적인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22] 그는 싸움에 앞서 살인과 재물 탈취를 금지하고, 일본군과 권력 귀족들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4대 강령을 발표하고, 규범 12조로 농민군의 규율을 바로 잡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22]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명의(四大名義)[24]와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백성의 궐기를 호소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충효를 온전히 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는다.] 병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멸하라.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제거한다.]

이에 정읍시 태인·김제시금구(金溝)·부안 등지에서도 농민들이 합세하여 그 수가 수천에 도달했다. 동학군의 봉기는 이로부터 본격화하였다. 그러나 전봉준이 창의할 때의 행동강령 중 부패한 외척을 내쫓는다는 것과 흥선대원군을 섭정공으로 재추대한다는 조항에 일부 농민군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고종과 왕비를 축출한다는 조항을 기대했던 일부 농민군 역시 당황해하였다. 전봉준은 오늘의 이 사태를 불러온 것은 민씨 가문과 탐관오리들이지 임금이 아니라며, 민씨 가문과 부패관료들만 몰아내면 되는 것이라며 이들을 안심시켰다.

각지의 궐기 [ 편집 ]

전투 태세를 갖춘 농민군은 5월 8일(음력 4월 4일) 부안을 점령하고, 5월 11일(음력 4월 7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하는 한편 정읍, 흥덕, 고창 지역을 습권하였다. 그리고 영광, 함평, 무안 일대를 거쳐 마침내 5월 31일(음력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25]

동학군은 전라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외부로 확산되었다. 충청도의 회덕, 논산 일부 지역과 경상도의 성주, 칠곡, 대구, 하동에서도 동학교도들이 궐기하였다. 다만 농민군의 세력이 보은군 이북으로는 상륙하지 못했는데, 이들과 달리 동학교주 최시형 등은 민란에 다소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민란을 일으키다가 잘못하면 교조 최제우의 명예회복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고, 자칫하면 역도로 몰려 교세에 탄압을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이었다.

금구 원평 전투와 전주성 입성 [ 편집 ]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음력 4월 초 금구 원평에 진을 쳤다. 실제로는 농민군의 구성원은 대부분 일반 농민이었고, 동학교도는 비교적 적었다. 농민군은 탐관오리의 제거와 조세 수탈 시정을 주장하였으며, 균전사(均田使)의 폐지를 촉구하였다.

고부의 황토현에서 감영 군대를 물리쳐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농민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유인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병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5월 27일(음력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5월 31일(음력 4월 27일), 이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동학군의 힘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정은 청국군을 요청하였고, 청국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텐진 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조선에 진출하였다. 이렇듯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동학군과 관군은 화의를 약속하고 교섭에 들어갔다.[25]

그러나 정부군은 완산에 머물면서 포격을 계속했고, 동학군은 여기에 대항할 만한 병기가 없어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다. 홍계훈은 이미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이 징계를 당했으며 앞으로도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여 징계하겠다는 것을 밝혔고, 한편으로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도착하였으며 일본의 군대도 조선 내 자국민 보호를 핑계로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출병하기로 했음을 알렸다. 6월 8일 청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뒤따라 일본 정부는 톈진 조약(1885년)에 따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전주 화약과 정치 개혁안 상정 [ 편집 ]

동학군은 여러 차례의 통문(通文)과 원정(原情)[26], 폐정개혁 요구안을 제시하면서 삼정(三政)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확인할 수 있다. 4월 4일 부안을 점령한 농민군은 법성포 이향에게 ‘동학군통문’ 9개조를 보냈다.

1894년 5월 22일(음력 4월 18일) 전봉준은 비협조적이던 나주 관아의 호장, 이방, 서리 등에게 공문을 발송하였다.

“ 전하께 아뢰어 국태공(흥선대원군)을 모셔다가 나라일을 보도록 하려 함으로써 아첨하고 비루한 자들을 모조리 파면시켜 내쫓으려는 것이니, 우리의 본의는 여기에 그칠 뿐이다. ” — 나주 감영에 보낸 사발통문의 일부

이보다 앞선 5월 20일(음력 4월 16일) 영광군에서 창의소 명의로 완영유진소에 보낸 통문에서도 ‘국태공께 감국케 하여 위로는 공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한다’고 하였다.

5월 23일(음력 4월 19일) 전봉준은 중앙군을 이끌고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에게 정장을 보냈는데 ‘억조(億兆)가 마음을 같이 하고 온 나라가 의논을 모아 국태공을 모시고 부자 사이의 윤리와 군신 사이의 의리를 온전히 하여 아래로는 여민을 편안히 하고, 위로는 종묘사직을 보전하는 것이 우리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장차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변치않을 것이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굽어 살피옵소서’라는 내용이었다.

홍계훈은 동학 농민군을 일망타진하려 내려왔다가 정장의 내용을 보고 놀라 멈칫하였다. 홍계훈은 이들과 면담을 추진했고 바로 전봉준외 농민군 지도부는 초토사 홍계훈에게 ‘호남유생원정’ 8개조를 제시하였으며, 5월 초 전주화약 직전 전주화약의 조건으로 초토사 홍계훈에게 27개조를 추가로 제시하였다.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한 후 5월 11일경 순변사 이원회에게 ‘전라도유생등원정’ 14개조와 5월 17일경 ‘원정열록추도자’ 24개조, 그리고 5월 20일경 장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개혁안’ 13개조 등을 제시하였다.[27]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탐관오리 숙청 횡포한 부호 처벌 불량한 유림과 양반 처벌 노비문서 소각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백정이 쓰는 평량갓(平凉笠)을 없앤다. 과부 재가 허락 이름 없는 잡세 폐지 인재 등용, 문벌 타파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공사채(公社債) 면제 토지 평균 분작 — 폐정개혁 12개조

그런데 서울대학교 교수 유영익에 의하면 이 때의 폐정개혁 12조는 허구라 한다. 유영익은 자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동학농민운동을 다룸에 있어서 다른 한 명의 공동집필자와 함께 이른바 ‘동학 12개조 폐정개혁안’이란 것이 허구라고 밝혀냈다고 주장하였다.[28]

전주성에서 철병했으나 이미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내에 진입한 상태였다. 한편 홍계훈은 전주화약 이후에도 이들을 역적으로 취급했다. 이에 전봉준은 6월 7일(음력 5월 4일)에 항의문을 보내는데, ‘태공을 받들어 나라를 감독토록 함은 그 이치가 심히 마땅하거늘 왜 이를 불궤라고 하느냐?’라고 하였다.

12조 개혁안의 진위 문제 [ 편집 ]

한편 이때 제출되었다는 12개조 개혁안은 진위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이견이 제기되었다. 서울대학교 교수 유영익은 “내가 국사교과서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는 2002년 어느 날 나의 한 제자가 내 연구실로 찾아와 자기가 고등학교 검인정 근현대 교과서를 집필했다고 자랑하면서 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겪은 실화 한 토막을 털어놓았을 때이다.”라고 고백하였다.[20]

유영익에 의하면 “그 제자는 동학농민운동을 다룸에 있어 다른 한 명의 공동 집필자[20]와 함께 이른바 ‘동학 12개조 폐정개혁안’이란 것이 허구임을 알기 때문에 애당초 그 개혁안을 교과서에 싣지 않기로 작정했는데 당시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집필자들에게 시달한 ‘국사 교육내용 전개의 준거안’에 그 개혁안을 의무적으로 인용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교과서에 실었다고 고백했다.[28]’ 한다.

유영익에 의하면 폐정 12개조 개혁안은 출처가 불확실하다 한다. 그에 의하면 ‘나는 12개조 개혁안이란 것이 1940년에 어느 무명의 역사가(오지영)가 역사소설 동학사라는 책에 임의로 삽입한,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 자료임을 논문을 통해 입증했기 때문에 이 고백을 듣고 깜짝 놀랐다.[28]’고 한다.

교육부가 ‘국사 교육내용 전개의 준거안’이라는 것을 내세워 사실에 어긋나는 비진리를 국사교과서에 싣도록 강요한 사실에 분개하였다. 이 얘기를 듣고 나서부터 나는 우리나라 교육부가 일본 문부성 못지 않게 역사 왜곡을 자행한다고 생각했고 그 후로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에 대해 입을 다물게 되었다[28]’고 고백하였다. 반면,이러한 주장에 대해 동학농민운동사를 전공한 박맹수 원광대 교수는 “오지영의 ‘역사소설 동학사’는 픽션으로서 소설이 아닌 회고록 성격의 글”이라며 유 교수 의견을 정면 반박했다.

박 교수는 “오지영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 지도자 출신으로 갑오년에 체험했던 바를 회고록 형식으로 글을 쓴 것”이라며 “확인되는 사료들로 봐서 동학농민운동 당시 이미 27개 조항 요구안이 있었음이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집강소 설치 [ 편집 ]

6월 11일(음력 5월 8일) 관군과 2차 강화를 맺은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했으나 동학군은 교세 확장을 구호로 그들의 조직을 각지에 침투시키고 전라도 53군에는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교섭에 들어가 전봉준은 폐정 개혁을 골자로 하는 27개조에 달하는 조건을 내놓았고, 이에 관군 대표인 홍계훈이 무조건 수용함으로써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동학군은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잘못된 정치의 개혁을 위한 행정 관청 구실을 하게 하였다.[25] 특히 김개남은 5 ~ 6만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집강소 설치에 반대하던 남원 부사 이용헌과 나주의 현령들을 살해하여 그곳에도 집강소를 설치했다.

집강소의 행동 강령은 총 12개조로 양반 중심의 봉건 사회를 혁파하고, 신분 차별을 없애며, 인습에 갇혀 사는 여성들을 해방시켜 농민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든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집강소 행동 강령은 17세기 이래 진보적인 실학자들이 내걸었던 개혁안과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주장했던 정책보다 훨씬 진보된 내용이었다.[25] 그만큼 시대를 멀리 내다보았던 전봉준의 개혁 사상은 봉건 사회인 조선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혁명적인 기치를 내걸고 있었다.[25] 그러나 전봉준은 이번 기회에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시키자는 일부 강경파의 견해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제2차 봉기의 성격 [ 편집 ]

이 중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29]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29]’는 것이다.

일본군 의 개입 [ 편집 ]

톈진 조약이 파기됨에 따라 청군과 함께 조선에 진주한 일본은 힘으로 내정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이 때문에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30] 조선조 동안의 사대주의에 불만을 품었던 개화파 정치인들은 일본을 적극 지지하였다. 또한 일부 개화파는 일본을 이용하여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서 빨리 개화, 변혁을 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동학 농민군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경계심을 느낀 고종은 신하들에게 직접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 청나라군을 이용해서 이들을 진압하게 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청나라군의 유입을 경계한 일본 역시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킨다.

동학군의 세력 형성을 경계한 고종과 왕비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 안경수는 일본, 민영준은 청나라와의 외교 교섭을 통한 동학난의 수습에 적극 앞장섰다.[31]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관군과 함께 ‘동비 색출’에 나선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장악하였다.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은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한 번 봉기했다.[30]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궐기 목적에 폐정개혁과 민씨 척신세력 처벌, 대원군 옹립이라는 조항이 들어있음을 접한 민비는 동학군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을 계획한다. 또한 양반 사대부들은 최제우가 사이비 종교를 만들다가 혹세무민죄로 처형당한 것을 근거로 들어 동비들을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 그리고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충청도의 노론 위정척사파 계열 양반들과 보수적인 영남 남인들은 자체적으로 의병을 창의하여 동학군과 교전을 벌였다.

대원군의 접촉 시도 [ 편집 ]

대원군과 전봉준의 연합 [ 편집 ]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의 온건파와 비밀리에 연락한 흥선대원군은 동학군 내의 온건파가 대원군을 받들 것을 주장한다는 점을 주목했다.[2] 1894년 6월 흥선대원군은 손자 이준용과 함께 동학 농민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계획을 수립한다. 대원군파가 농민군을 상경시키고, 청국군을 끌어들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개화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당초 이준용, 이태용, 박준양의 시국대처 논의 속에서 그 윤곽이 짜여졌다.[2][32]

당시 박준양은 이준용에게 관직을 쉬고 외국으로 나가 10년 동안 견문을 넓혀 명망을 얻은 이후에 돌아올 것을 권하였다. 그 동안 고종은 노쇠하게 되고 왕세자(순종)도 그다지 큰 덕이 없으니 그때에 외국 명망과 국내의 관심은 자연히 이준용에게 쏠릴 것이고, 그러면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도 권력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2]

그러나 이태용은 큰일을 도모할 경우에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의 기대가 모두 대원군을 향하고 있고, 더욱이 동학군이 대원군을 받들겠다는 주장을 펴면서 봉기하고 있는 지금, 그들로 하여금 수십만 대중을 동원하여 올라오게 한다면 진실로 사람들의 무리가 하늘을 이긴다고 하듯이 일본군대가 비록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2] 이어 이태용은 이준용에게 한편으로 일본군을 만류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밤을 재촉하여 군중을 올라오게 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제안하였다.[2] 두 사람의 제안을 이준용은 대원군에게 알렸고, 대원군은 이태용의 안을 지지하여 박동진과 박세강에게 수십만 대중을 규합하여 속히 올라오게 하였다.[2] 한편 전봉준 등은 일본군의 유입으로 농민군이 분기탱천해 있음을 대원군에게 알려왔다.

손화중 등 타 지도자들 포섭 [ 편집 ]

흥선대원군이 포섭한 동학 농민군 지도자 중에는 손화중도 있었다. 손화중의 부인인 유씨가 임종 직전에 남긴 증언에 의하면 손화중도 대원군을 만나고[23], 그의 서신도 받았다고 한다.[23]

손화중의 부인 유씨에 의하면 손화중은 ‘동학 농민 운동 중에 서울을 다녔는데, 대원군하고 직접 상면을 했다[23]’고 한다. ‘그때 대원군의 서신도 받아 갖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는다.[23]’는 증언을 했다.

남접의 분열 [ 편집 ]

그러나 남접 내에서도 이견이 나뉜다. 대원군 가문의 식객 출신이었던 전봉준을 비롯해서 폐정개혁과 외척 세도가 퇴출, 대원군 옹립을 목적으로 했던 남접의 온건파와 조선왕조 자체를 부정한 김개남 일파는 갈등하게 된다.

조선왕조 체제는 인정하고, 외척 세력과 부패한 탐관오리들만 퇴치할 것을 주장하던 전봉준 일파는 조선왕조 자체를 부정하는 김개남 일파와 갈등하였고, 이는 동학 농민군 내부의 파벌 갈등, 알력으로 발전한다.

대원군 일파와 모의 [ 편집 ]

이에 따라 대원군과 함께 대원군파의 중심이었던 이준용은 관직을 내무협판에서 통위사로 옮겨 병권을 장악, 불시의 병력 사용에 대비하고 다수의 장정들을 모아 대궐 내에 은닉하여 일본군대가 북진하여 병력이 허약해진 틈을 노려 농민군과도 내외 상응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다. 농민군이 금강에 이르러 그 기세가 놀랄만하면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33] 병력을 일으켜 한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동학농민군과 사전에 계획을 짠 뒤, 이준용이 토벌을 명분으로 부대를 구성하면 동학농민군은 빠진다는 계획이었다.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출진명령을 얻어, 군병과 수백 명의 역사(力士)를 대동하고 과천, 수원 사이에 개부하여 오히려 일을 꾸며 합세 회군하여 서울로 들어와 사람들이 놀라고 왕이 피난할 때를 타서 한편으로는 그 부하인 통위영 병대[33]를 동원하려 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의 계획은 “농민군이 재기하면 그 토벌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서 개화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것으로 재기병을 촉구하는 밀사를 보냈던 것[34]”이었으며, 또 만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가게 되면 즉각 해산하였다가 그 해 11~12월 경에 강이 결빙하기를 기다려 청국병이 오게 될 형편이 되면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정부를 갱신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준용은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하여 한성까지 오면 자신은 동학군을 진압하는 척 할 것이니 적절히 싸우는 척 하다가 해산하라고 자신을 찾아온 일부 동학군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이준용이 이끄는 통위병 영대로서 왕실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수인들을 지휘하여 김홍집, 조희연,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죽이고 정부를 전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왕비와 태자를 폐하여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33] 한편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거사에는 위정 척사파 계열 유학자들도 동의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준용은 전봉준과 동학군 지도자들에게 이 점을 설명했다.

대원군, 이준용 의 음모 탄로 [ 편집 ]

흥선대원군과 이준용 등은 동학 농민군이 궐기하여 비상사태를 만든 후, 사람들을 동원, 올라온 대중을 한편으로는 서울 근방에 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로 들여보내 종로에 도회시켜 만인소청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투여하여 각국 공관에 조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35] 그러면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고 수십만 명의 일이고 또 외국에 어떠한 해를 끼치는[33] 일도 아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35] 일이 이루어지면 사신을 밀파하여 청국군에게 알려 앞으로의 시비에 대비하게 하고, 만일 일본군이 먼저 움직이면 일단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1894년 10월 중에 청국군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협공하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35]

그리고 대원군파의 사람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여 박준양을 영의정에, 이태용과 김모를 각각 좌의정, 우의정에 앉히려고 하였으며, 고운정을 충청감사나 영남감사에, 그리고 고종주를 전라감사에 임명하려고 하였다.[35]

8월 24일 청·일의 평양성 전투에서 기대했던 청나라의 패배소식이 알려진 후 대원군측의 일부 인사가 ‘정변계획’을 유보하자고 주장하자[34], 이준용은 머뭇거렸다. 이에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34]

“ 대사는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날의 물망이 모두 노대감(대원군)을 따르고 하물며 또 동학당은 상봉국태공(上奉國太公)의 설로 창의한 자들이다. 만약 몇십만 명을 이끌고 권토중래한다면 실로 소위 인중승천(人衆勝天)[36] 인바 일본군이 움직인다 한들 어쩌겠는가.[34] ”

동학농민군의 주장 중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섭정)도 요구하고 있었다.[34]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사전모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음을 주목한 대원군측이 농민군을 이용하여 일본군과 친일개화파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음을 시사해준다.[34]

그러나 대원군과 이준용의 정변 음모는 일본 공사관의 첩보망에 걸려 실패로 돌아간다.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은 일본 공사관에 소환되었고 청나라와 손잡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의도를 추궁당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 공사관은 1894년 9월 일본 본국에 연락하여, 일본군 병력을 증원하여 경상남도 동래군과 부산항을 통해 파견한다.

제3차 봉기 [ 편집 ]

제3차 봉기 궐기 [ 편집 ]

1894년 9월 전봉준, 김개남 등은 다시 사발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하였다. 전라도, 충청남도 등지에서는 남접과 서포 소속 동학군과 농민군이 궐기하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교주 최시형의 북접에 도움을 청해 연합 전선을 폈다. 제2차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을 합해 약 20만 병력이었다.[30]

동학 농민군의 일부가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씨 내각의 조선 조정은 농민군을 제거할 계획으로 일본과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최경선, 김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천민, 김봉득, 김봉년, 유한필 등이 전라북도 전주부 삼례역 역촌에서 다시 새로운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분격한 농민군은 이 해 음력 9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하였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이를 ‘제3차 동학 농민 운동’으로, 9월 봉기 또는 제3차 봉기, 삼례봉기로도 부른다.

타협론과 결사항전론의 대립 [ 편집 ]

제1차, 제2차 봉기의 휴전은 동학군에 불리하여 정부는 강화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군은 물론 일본군도 6월 9일(음력 5월 6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새 내각이 친일 인사들이 있자, 일본은 외교통인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주일 조선 공사로 임명했다. 7월 25일(음력 6월 23일) 드디어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험악한 정세를 조정하였다.

이에 동학군은 10월 12일(음력 9월 14일) 삼례에서 회의를 연 결과 전봉준·김개남 등의 과격파는 최시형·이용구(李容九) 등 온건파의 타협론을 거부한다. 그 뒤 전봉준이 4천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과 북접의 연합을 시도했다. 전봉준은 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선택하고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은 금산- 청주 -서울로 진격로를 정한다. 그동안 전봉준의 봉기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손병희는 교주 최시형의 승인 하에 충청도 농민군(북접)을 이끌고 청산(靑山)에 집결하여 논산(論山)에 합류했다.[37] 그로써 김개남 대신 음력 10월에 북접의 손병희가 논산에서 합류하여, 남접 1만과 북접 1만을 합해 총 2만여 군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 남북연합 농민군은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일본군의 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전신줄을 절단하면서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 조정과 일본군은 신정희, 허진, 이규태, 이두황 등에게 3,200명의 관군과, 일본군 미나미 고시로가 이끄는 2,000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맞섰다.

공주성 진입 지연 [ 편집 ]

6월 말, 일본은 이 기회에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려고 전쟁을 시작했다. 청일전쟁은 일본도 청나라도 아닌 조선 땅에서 벌어졌다. 9월 16일(음력 8월 17일), 평양 전투에서 일본은 승리를 거두었다. 평양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외세가 판을 치는데도 무기력한 정부를 본 전봉준과 농민군 지도부는 9월 12일, 마침내 2차 기병을 결정했다.[18] 농민군은 공주를 손에 넣고 곧장 서울로 진격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정부군과 일본군 연합군이 먼저 공주에 입성했다.[18]

농민군이 늦어진 이유는 전쟁을 원치 않는 동학 북접 교단의 비협조 때문이었다.[18]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18] 전주성을 함락시키고 호남 일대에 집강소를 두어 한국 최초의 농민자치를 실행한 것은 전적으로 남접 농민군의 힘이었다. 남접과 달리 북접은 중농 이상이 많아 그만큼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18] 남접이 2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18] 9월 하순,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에 최시형은 마지 못해 합류를 허락했다.[18] 논산에서 북접군과 남접군이 합류한 것이 10월 9일이니 봉기 결정 후 한 달을 끈 셈이었다.[18]

일본군과의 전투 [ 편집 ]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23일(26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홍성 농민군은 금강 건너편의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만여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숫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30]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30]

우금치, 공주 전투, 청주 전투 패전과 퇴각 [ 편집 ]

12월 5일(음력 11월 9일) 전봉준은 드디어 총공격을 명령했다. 농민군 주력 부대가 우금치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금치는 견준산과 주미산이 만나 만든 가파른 고개로 개금티라고도 부른다. 물밀 듯 올라오는 농민군에게 정부군과 일본군의 최신 무기가 불을 뿜었다.[38] 시간이 갈수록 농민군의 패색이 짙어갔다.[38]

수만이나 되는 비도(匪徒)가 4,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성동추서(聲東趨西), 섬좌홀우(閃左忽右)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무슨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덜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하지 못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38]

정부군의 좌선봉장 이규태는 나중에 이렇게 실토했다.[38] 주력부대가 우금치에서 결사 항전하는 동안 농민군 일대는 공주로 향했다.[38] 들은 공주 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을 공격했다. 조를 짜서 조별로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감영을 눈앞에 두고 수없이 많은 동학 농민군이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갔다.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이루어 금강으로 흘러들어갔다.[15]

한편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전주를 거쳐 금산을 점령하고, 신탄진을 거쳐 청주로 진격하였으나 청주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고 후퇴하였다.

패전과 실패 [ 편집 ]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 새벽,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농민군은 논산으로, 다시 전주로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원평, 태인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역시 패했다. 전보운은 직속부대만 남기고 농민군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15]

곧이어 정부군 측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죄없는 양민까지 마구잡이로 체포, 학살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부녀자를 능욕했다. 그동안 쌓아 올린 농민적 사회경제의 기반은 여지없이 무너져나갔다.[15] 백양사에 숨어 동정을 살피던 전봉준은 정부군이 살육에 정신 없는 틈을 타서 직속부대를 서울로 잠입케 하고 세 명의 부하와 함께 순창으로 갔다.[15]

동학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30] 전봉준은 정읍과 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몸을 숨겼다.[30] 그러나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한양으로 압송되었다.[39]

체포와 최후 [ 편집 ]

김개남은 12월 27일(음력 12월 1일) 태인에서 친구인 임명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된 후 처형된다. 1894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순창에서 전봉준은 상금에 눈 먼 옛 동지김경천의 배신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일본군에 의해 서울의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 그 후 법무아문으로 넘겨져 1895년 3월 5일(음력 2월 9일)부터 4월 4일(음력 3월 10일)까지 5차례 심문을 받았다.[15] 법무아문에서는 고문을 가하며 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를 캤지만 그는 일절 대원군을 언급하지 않았다. 체포된 전봉준은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이렇게 밝혔다.

“서울에 쳐들어온 후 누구를 추대할 생각이었는가? [40] ”

” “일본병을 물러나게 하고 악간(惡奸) 관리들을 축출해서 임금 곁을 깨끗이 한 후에 몇 사람 주석(柱石)의 선비를 내세워 정치를 하게 하고 우리는 곧장 농촌에 들어가 상직(常職)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국사를 들어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사에게 협합(協合)해 합의법에 의해서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40]”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완강하게 부인하였다. 그러나 김개남 등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진술하였고 즉각 처형된다. 결국 1895년 4월 23일(고종 32년 음력 3월 29일) 재판장은 전봉준 외 체포된 동학농민군 지도부에게 부대시참을 선고했다. 전봉준은 무릎을 치고 일어나면서 외쳤다.[15] 전봉준은 자신이 역적이 아님을 들어 역적의 누명을 쓰는 것은 억울하다고 호소하였다.

“ 정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15] ”

1895년 4월 23일(음력 3월 29일)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39] 한편 일부 농민군 지도자는 흥선대원군의 특별 사면 탄원으로 석방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공에 눈이 먼 고향 사람의 손에 의해 민씨 정권 인사들에게 넘겨져 대부분 처형당했다. 죽기 전, 전봉준은 시 한 수를 지어 자신의 회한을 읊었다.

“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하더니 / 時來天地 皆同力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 運去英雄 不自謨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야 / 愛民正義 我無失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 愛國丹心 誰有知[15] ”

한편 김개남 등 일부는 태인 산내면 종송리에 있는 매부 서영기의 집에 숨어 있다가 친구 임병찬의 고발로 전주에 있는 강화영의 중군인 황헌주에게 잡혀 불법으로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당했다.[41] 나머지 인사들은 시골에 숨어살거나 술주정꾼 행세를 하면서 겨우 의심을 피해 생존하였다. 농민전쟁의 실패와 함께 동학 농민군을 이용하여 명성황후를 타도하고 이준용을 추대하려던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기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주요 전투 [ 편집 ]

황토현 전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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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군이 전북 정읍 황토현 일대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첫 승리를 거둔 전투로 후에 황룡촌 전투에서도 승리하게 되었다. 농민군이 봉기하고 태인과 부안 관아를 잇따라 점령하자 조정에서 전라감사 김문현, 영관 이경호 등이 영내 잡색군 등 총 1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와 정읍 황토현에서 격돌했다. 4월 7일 새벽 농민군은 관군에게 포를 쏘아 혼란에 빠뜨린 뒤 미처 대처하지 못한 관군을 추격해 패전시켰고 이 과정에서 영관 이경호가 농민군들에게 체포되어 전사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고 전주로도 진격할 수 있었다.

황룡천 전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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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성 전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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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전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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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전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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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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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음력 11월 공주 남쪽의 우금치(牛禁峙)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큰 격전을 벌였다. 약 1주일 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500여 명의 생존자가 전주 남쪽의 금구 원평(院坪)으로 후퇴하였다.

농민군은 무너미 고개와 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붙이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관군을 우금치 옆 뱁새울 앞산에 주둔하고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관군을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 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미터 앞까지 조일 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려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과 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써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고, 전봉준은 군인, 이서, 상인들에게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 연합군은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에 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졌다. 12월 23일(음력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전투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주력부대로서는 일본의 신식 무기에 다수의 전사자를 낳고 패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지역 각지에서 많은 접주들이 항거하여 봉기하였으나 그 규모는 소수였고, 전봉준의 부대만이 대규모로서 호남의 5천명을 이끌고 일본군 수만 명을 상대로 항전을 벌였으나 전략 미숙과 병기류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여 마침내 일본군을 끌어들인 조선 조정의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에 의해 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음력 11월에 전봉준 등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된 후 일본 공사 또는 조선 의금부의 재판을 받고 이듬해 사형되었으며(1895년 음력 3월), 이후 조일 연합군의 호남 일대의 농민군 대학살전이 일어났다. 이로써 동학농민전쟁은 거병한 지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승려 [ 편집 ]

동학 농민운동에는 불교 승려들도 참여하였다. 이는 동학 농민군의 주요 파벌 중 하나인 서포의 지도자 서장옥이 불교 승려 출신인 점이 작용하였다.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중에는 불교 승려 출신의 접주가 있었다. 남접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서장옥(다른 이름은 서인주)는 불교 승려 출신으로 최시형과 함께 최제우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도주였던 최시형과 동문이었으므로 일반 접주였지만 최시형의 제자들에 비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서장옥은 충청남도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 접주였다.[42]

서장옥은 일찍이 불교 승려로 30여 년을 수행하다가 동학에 투신, 1894년 전봉준과 함께 창의하니, 서장옥이 이끄는 접은 호서남접 혹은 서포라고 불렸다.[19]

1893년 2월의 집회 때 남접 쪽에서는 북접이 주최하는 보은 집회의 동정을 살피려고 긍엽(亘葉)이라는 승려를 파견까지 하였다. 갑오 동학농민전쟁에는 서장옥 뿐만 아니라 수많은 승려도 참가하였다. 즉 원평의 남접 호남세력과 서포의 연합 집회에 불갑사의 인원(仁原), 선운사의 우엽(愚葉), 백양사의 수연(水演) 등 호남 지방 승려들이 참가했다.[43] 그밖에 충청남도 산사의 일부 승려들도 서포에 가담하였다.

진압 이후 [ 편집 ]

1907년 고종의 특지로 북접의 최시형 등 일부는 신원되었다. 그러나 전봉준과 김개남 등은 1910년(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복권되지 못하였다. 일부 농민군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산중에 은신하거나 항일 의병 전쟁에 흡수되기도 했다.

기타 활동 [ 편집 ]

대원군파와 연결 [ 편집 ]

대원군파는 1894년 7월경부터 일본 세력을 퇴치하기 위해 청지방의 사회세력과 평양의 청나라군의 협력을 받으려 하였다.[44] 이때 동학 농민군에게도 사람을 보내 협력을 요청했다.

구체적으로 대원군은 동학농민군, 지방의 토호세력, 양반유림, 공신의 자손들, 보부상 등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의병보익와 군수지원을 촉구하였다.[45]

개화파 제거 기도에 참여 [ 편집 ]

서울에서 동학 농민군 일부와 대원군파는 은밀히 자객을 동원하여 개화파의 중진인물인 김홍집, 김학우, 김가진, 안경수, 조희연, 유길준, 김종한, 이윤용 등을 암살하려 하였다.[45] 농민군은 이 계획에 협조한다.

이 암살계획은 동학농민군이 이준용 휘하의 통위영과 협력하여 서울을 공격하기로 하였던 1894년 8월 중순경에 실천에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군국기무처 내에서 대원군과 이준용의 반란 모의를 조사하자고 주장했던 김학우를 암살하는데 그침으로서 제한적인 결실만을 거두었다.[45] 이후 농민군은 감쪽같이 빠져나갔고 흥선대원군을 체포할 수 없었던 내부에서는 이준용을 체포하여 의금부에 감금하였다.

평가 [ 편집 ]

동학 농민 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이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과 동학인의 지도하에 일어난 농민 항거라는 점에서 이전의 민란과 다르며,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도 처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동학농민전쟁은 몇 가지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46]

첫째, 농민군은 조선 관군을 넘어선 외세의 개입에 대하여 맞서 싸울 만한 효과적인 무기와 병력이 부족하였다. 둘째, 농민들 중심의 동학군에 대항하여 기득권을 가진 향촌사회의 지주·부호·양반들의 민보단(民堡團)등을 통한 저항을 과소 평가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 하면서도 대원군에 의지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47]

더구나 동학군 내 과격파는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였고, 온건파 중 전봉준 등은 흥선대원군과 협력하는 등 동학군 내부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도 않았다는 단점도 있었다.

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 동학 농민 운동은 애국적이고 애민적인 동기에서 일어난 구한말 최대의 농민 중심의 항쟁이었다. 한편, 농민군이 근대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혁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다는 역사가의 견해도 있다.[46]

결국, 동학농민전쟁은 순박하고 애국적인 농민들의 자기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반일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에 양반유생과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내정개혁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반영된 내용으로는 과부의 재가 허용과 신분제 폐지 등이 있다.[46] 그러나 이 개혁에는 농민들의 소망이었던 토지 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46] 김개남 등 일부 과격파의 국왕 참칭이라던가, 전봉준 등 일부는 흥선대원군 등과 내통했던 점 역시 대중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없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

관련 인물 [ 편집 ]

대원군과 전봉준 [ 편집 ]

1888년(고종 25) 무렵 전봉준은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48] 그리고 그의 인도로 동학에 입도한다. 1890년 무렵 전봉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뒷날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로 관군에 체포된 뒤 1895년 일본 영사관에서 있었던 제2차 재판에서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스스로 동학에 입교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러나 전봉준은 1890년 운현궁을 찾아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49] 1892년 초 전봉준은 운현궁 문객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동리 서당의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893년 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48]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48]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48]

전봉준과 천우협 [ 편집 ]

한편 기요후지 고시치로(清藤幸七郞)의 저서 《천우협》(千佑俠, 덴유쿄)에서는 1894년 6월 27일에 부산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정치 폭력 조직 천우협 회원 일부가 전봉준을 만나 동학 동민 운동을 지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천우협》에 나타난 만난 곳과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 나타난 장소가 다르며,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서는 당시 전봉준을 따른 군세는 고작 20여 명이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5백여 명으로 기술하여 그 수치가 매우 차이가 크다. 결정적으로 《천우협》에 나타난 시기인 6월부터 8월 말까지는 전혀 전투가 없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천우협 회원들과 전봉준 일동이 협조하여 관군을 격파했다고 하였다.[50] 전봉준은 흥선대원군 계열 외에도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청나라 세력을 몰아낼 목적으로 천우협의 회원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폭력 조직 천우협은 팔굉일우를 바탕으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바닥에 깔고 있는 조직으로 다른 나라의 독립이나 부국 강병을 도울 만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천우협》이 전봉준이나 동학군을 도우려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는 시각도 있다.[출처 필요]

한편 동학측 자료에서도 전봉준과 천우협(天佑俠)의 접촉을 확인해주고 있는데 『천도교 창건사』에 의하면 “일본인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마노(瑪瑙)[51]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52]’하여 전봉준과 천우협 측의 면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민씨 세력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일 때만 해도 천우협은 동학 농민 운동에 호의적이었지만, 일본군까지 진압에 끌어들이게 되자 다소 애매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이 완전히 진압되어 사태 수습이 어렵다고 여겨지자 천우협은 동학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이 진압된 뒤 천우협은 다시 동학측과 사람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한다.

흥선대원군의 농민운동 사주 [ 편집 ]

한편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53] ” — 1894년 2월 21일,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보낸 비밀 정보

한편 흥선대원군은 동학 농민운동이 진압된 뒤, 농민군의 한 사람인 이방언이 처형당하기 전에 살려주었다. 그러나 이방언은 고향으로 내려다가다 전라도관찰사가 잡아다가 그 아들과 함께 불에 태워 죽였다.

그 증손자의 증언에 의하면 ‘대원군과 접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증거로서 석대전이 끝나고 그 양반이 잽혀서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자기조 사형 아니면 무죄 방면, 지금 나온 재판 기록에 엊그저께가지도 총무처 기록보관소에서 재판기록 책을 보냈습디다. 그 양반은 무죄 방면이 되지 않았습니까? 무죄 방면이 될 수가 없는 분이었는데. 그렇게 된 것은 대원군이 주선을 해서 무죄 방면을 받았다.[54]’고 한다. 이어 이방언의 증손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래가지고 (이방언이) 고종 앞에까지 가서 귀화초식이란 말이 뭔 말인지는 모르지만, 돌아올 때[54] 귀자, 될 화자, 풀 초자, 먹을 식자, 귀화초식의 승봉을 받고, 나락 평정이 되면 다시 부를 테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때 국가에 공을 세워라 하는 크나큰 은전을 입고 내려왔는데[55]’라는 것이다.

이방언과 흥선대원군과의 관련설은 송기숙이 녹두장군에도 썼듯이 꾸준히 이야기꺼리가 되고 있다. 이런 관계로 하여 이방언은 무죄 방면되었다는 것이다.(총무처 기록보관소 발행의, 동학관련판결문집 참고). 그러나 이방언은 놓여 나와도 곧바로 고향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55]

이방언의 증손의 증언에 의하면 ‘동학은 피차가 출혈이 많고 사상자가 많이 나서 여기로 바로 못 오시고 회천면에 있는 보성 군수에게로 갔대. 보성 군수가 이상한 것이 그 말이 맞어들어가. 거시기를 보면 보성 군수가 재판을 받았어요. 군수도 동학에 협조했다고 해가지고. 근데 보성 군수도 무죄 방면을 했어. 그 사람도 동학에 협조한 사람이여. 보성 군수의 협조로 보성군 회천면 쇳대에 은신해 있다가 전라 감사의 재체포령에 의해서 잽혀가지고 장흥 장대에서 자기 외아들 성호와 같이 동참을 당하셨어요. 지금 성운고등학교 자리라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총살도 아니고 효수도 아니고 산 사람을 묶어놓고 그 위에다.[55]’ 흥선대원군의 탄원으로 살아난 이방언은 전라도 관찰사에 의해 처형당한다. 이방언은 짚을 씌워 불에 태워죽이는 분살형을 당했던 것이다. 그래도 시신을 집안 어른들이 수습해서 묘를 쓴 것은 여느 농민군 지도자들의 경우보다 나은 편이었다.[55]

김구 [ 편집 ]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김구는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고 몸을 숨겼다.

기타 [ 편집 ]

윤치소 내외, 동학 농민군 진압 의병장의 한 사람이다.

박성빈, 동학농민군의 고령, 성주지역 접주였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헌부감찰인 윤치소(尹致昭)는 아산 출신 조중양과 함께 300명 정도를 모아서 의병[56]을 조직하고 창의통문을 천안, 아산, 온양 지역에 돌리고 천안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그는 일제하 대지주이자 사업가로서 친일로 변신, 해평 윤씨 일족인 윤웅렬, 사촌인 윤치호 등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57] 윤치소는 후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 경기도지사를 지낸 윤원선의 아버지였다. 한편 동학농민군 고령, 성주 지역의 접주로 활동하다 체포, 사형을 모면한 박성빈은 대한민국의 5~9대 대통령을 지낸 군인 출신 정치인 박정희의 아버지이자 총리 김종필의 처조부가 된다.

1894년 10월 토포사 윤영렬은 아산(牙山)에 사는 조중석(趙重錫)과 함께 장정 300명을 모아 천안군 목천면에 출몰한 도적을 토벌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의 토벌에 참여한다. 윤영렬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조중양과 함께 토벌군에 별군관으로 차출되었다.[57] 별군관으로 차출된 그는 관군 외에도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어 관군과 의병 병력을 이끌고 충청남도 아산과 천안 일대의 동학 농민군토벌에 참여하였다. 윤영렬은 윤보선 대통령의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상하이에 망명중이던 윤치호는 동학 농민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패 원인 [ 편집 ]

명성황후는 2차 봉기 때는 청나라군을 끌어들였고, 3차 봉기 때는 일본군을 끌어들여 교전케 하였다. 2차 봉기 때에는 전주 화약을 체결하였지만 3차 봉기때는 일본군과 조선 관군, 청나라군과 관군 연합군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또한 정권 전복을 원치 않는 북접의 반발과 왕실을 부정하는 남접 내 급진파의 존재 역시 농민군의 내분을 불러왔다. 동학군 남접이 2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18] 남접과 서포의 군사에 대한 북접의 비협조 역시 농민군의 활동을 어렵게 했다. 논산에서 북접군과 남접군이 합류한 것이 10월 9일이니 봉기 결정 후 한 달을 끌었다.[18] 북접과의 연합에 너무 시간을 소비했고, 또 남원의 김개남 부대가 독자 행동을 한[15] 것 역시 세력 약화의 한 원인이었다.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는 전봉준이 체포된 후 다섯 차례 진행된 전봉준에 대한 법정 심문 기록이다. 법부아문의 재판관과 일본 영사가 배석한 가운데 1894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심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나 일본측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추궁한 것이 농민운동과 흥선대원군과의 관계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 동학혁명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등 혁명가로서의 의연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갑오동학혁명의 원인 및 경과, 농민군의 인적 구성, 전봉준과 동학의 관계, 동학의 교리 ·조직 ·교세 및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두 책 모두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서광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봉준: 전봉준(全琫準)이다. 서: 전명숙(全明淑)이라는 자는 누구냐? 전: 명숙은 나의 자(字)다. 서: 전녹두는 누구냐? 전: 사람들이 나를 그리 부른다. 서: 왜 난을 일으켰으냐? 전: 어찌하여 날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작란(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 서: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없는 양민을 죽게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서: 그리하면 지방의 방백수령을 혼내주면 됐지 왜 서울에 입성코저 했는가? 전: 국체를 무시하고 궁궐을 침범한 왜놈들을 응징코저 한 것이다. 서: 그럼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다 내쫓고자 했는가? 전: 아니다. 외국인은 통상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왜놈들은 군대를 주둔시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어찌 뿌리가 썩었는데 가지를 친다함이 의미가 있을손가? 서: 너는 동학의 괴수(魁首)냐? 전: 나는 의를 펴고자 일어났을 뿐이다. 동학의 괴수라 함은 가당치 않다. 서: 동학엔 언제 입당하였느냐? 전: 삼년전이다. 서: 왜 입당하였는냐? 전: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守心)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敬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서: 동학의 주의(主意)가 무엇이냐? 전: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서: 그렇대면 그대는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 보다는 보국안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학이라는 조직을 이용한 것밖에 더 되느냐? 전: 동학은 본시 우리 해동 조선땅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 도학(道學)에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서: 송희옥(宋喜玉)을 아는가? 전: 면식은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 자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이 전라일도 도집강(都執綱)이요 너의 가까운 친척이라는데도 알지 못한단 말이냐? 전: 그는 본시 부랑자로 홀왕홀래했을 뿐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의 기서(奇書)에 의하면 너의 재차 기포는 국태공(國太公) 대원군과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전: 어찌 척양척왜가 대원군 한사람의 주장일까보냐? 그것은 만백성이 원하는 바이다. 내 창의문에 써있는 몇구절로써 그런 억측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대원군은 우리의 의거가 해산되기만을 효유했을 뿐이다. 우리의 의거는 대원군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 서: 너는 대원군을 서울 운현궁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데? 전: 유언비어일 뿐이다. 나는 대원군을 만난 적이 없다. 서: 동학에 남접 북접이 있다는데 그 구별은 무엇이뇨? 전: 그것은 호남과 호서의 지역적 구별일뿐 동학이 두개인 것은 아니다. 동학은 삼십년전 경주에 살던 최제우(崔濟愚)로부터 시작하였고 동학의 모든 접주는 최법헌(崔法軒)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최법헌이 팔도(八道)의 접주의 직책을 총괄한다. 서: 최법헌이 누구인가? 전: 해월 최시형이다. 이름은 최경상이다. 서: 그럼 너도 기포의 허락을 최법헌으로부터 받았는가? 전: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충의(忠義)란 본심(本心)이다. 그대 발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갤러리 [ 편집 ]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

같이 보기 [ 편집 ]

기타

관련 서적 [ 편집 ]

부산예술문화대학동학연구소, 《해월 최시형과 동학 사상》 (예문서원, 1999)

조광환, 《소통하는 우리역사》 (살림터, 2008)

임종국,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돌베개, 1991)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경인문화사, 2007)

김중현·이희근 외 공저, 《불멸의 15인 시공 초월 맞장 인터뷰》 (서해문집, 2008)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7년 겨울호 (역사비평사, 1997)

배항섭, 《조선후기 민중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의 발발》 (경인문화사, 2002)

신복룡, 《한국사 새로 보기》 (도서출판 풀빛, 2001)

장영민, 《동학의 정치 사회운동》 (경인문화사, 2004)

이돈화, 《천도교 창건사》 (천도교중앙종리원, 1950)

참고 자료 [ 편집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동학혁명”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주 [ 편집 ]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金箕範)·손화중(孫華中)·최경선(崔敬善)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민간에 포고하여 이번의 거사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에 있음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하였다.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의 이름으로 된 ‘무장동학포고문’으로도 불리는 이 창의문에서 과감히 봉기할 것을 요청하자 근방의 10여 읍에서 이에 호응하고,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의 앞장에 서게 되었다.

전봉준은 같은 해 4월 말 고부·흥덕·고창·부안·금구·태인 등 각처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김개남과 모의하여 고부 백산(白山)에 집결시켰다. 여기서 항전의 대오를 갖추게 된 후 전봉준이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김개남이 총관령(總管領)으로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전봉준은 우선 창의의 뜻을 천명하는 4개 항의 행동강령인 ①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③ 일본오랑캐를 내쫓아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하여 권귀(權貴)를 모두 죽일 것 등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창의의 뜻을 밝히는 또 다른 격문을 작성하여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무장·백산에서의 봉기는 지역적인 민란의 성격을 지양하고 이제는 반침략·반봉건을 지향하는 외세와 집권층에 대한 도전이며 개혁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5월에 들어서면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부안관아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과 초군(哨軍) 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별초군 250명과 보부상으로 편성된 관군을 이끌고 부안 방면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관군은 5월 10일에서 11일 새벽에 걸쳐 도교산(道橋山)에 근거를 둔 동학농민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황토현싸움에서 승리하자 동학농민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으로 진격하여 이를 점거하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의 보고에 의하여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알게 된 정부는 5월 6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경군을 보내 진압하기로 결정하고 현지로 출동하게 하였다.

홍계훈은 장위영병(壯衛營兵) 약 800명을 3개 대대로 나누어 해로를 통하여 전라도 군산포에 이르렀다. 그러나 5월 11일 전주에 입성한 경군은 극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도망자가 속출함으로써 병력이 반감되어 있었다.

이 병력으로써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한 초토사 홍계훈은 정부에 증원군의 파견을 요청하는 동시에 청군차용(淸軍借用)도 아울러 주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증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5월 19일 장위영병 300명과 강화병(江華兵) 500명을 증파하였다.

총제영중군(總制營中軍) 황헌주(黃憲周)가 증원군을 이끌고 인천을 떠나 영광 법성포(法聖浦)에 이르렀을 무렵, 동학농민군은 이미 영광 일대를 점거하고 있었다.

한편 왕은 5월 23일 직접 전라도민에게 윤음(綸音)을 내려 불법 지방관의 징계를 약속하고 실제로 민폐가 되는 것은 여론에 따라 시정할 것을 선포하였다. 또한 위협에 못 이겨 가담한 사람은 아무 벌도 주지 않을 것을 약속하여 난도(亂徒)로 하여금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타이르는 선무책을 썼다.

전주성 내에서 정세의 추이를 관망하던 홍계훈은 증원군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5월 22일 동학농민군 추격작전에 나서 전주를 출발하여 남진을 시작하였다. 3대(隊)의 경군을 거느리고 정읍·고창을 거쳐 영광에 이르렀으나 동학농민군은 이미 이곳을 떠나 장성 방면으로 이동한 뒤였다.

27일에 이르러 증원군과 합류한 초토사의 경군은 동학농민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장성 남쪽인 황룡촌(黃龍村)에서 접전을 벌였다. 처음에 이학승(李學承)이 거느리는 경군의 별동대는 동학농민군에 대하여 기습적인 포격을 가하여 사상자 수십 명을 내게 하였으나, 즉시 반격을 받아 패주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으며, 이 여세를 몰아 5월 28일에는 장성을 떠나 북상의 길에 오르고 5월 31일에는 드디어 전주성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황토현에서 패배한 뒤 전주는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어서 전라감사 김문현과 판관 민영승(閔泳昇)은 성내에 남아 있던 군졸과 민정(民丁)을 동원하여 성문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놀라 대항해 보지도 못하고 다투어 도망치고 말았다.

전주에 무혈 입성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성내를 지키면서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 무렵 정부의 구원요청에 따라 청군이 출동하고, 뒤이어 일본군도 출동해 옴으로써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동학 남접의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휩쓸고 있을 무렵, 북접의 최시형(崔時亨)은 처음 거사에 반대하고 순수한 종교운동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 중진들이 농민운동에 교단을 들어 참여할 것을 권고하게 되자 이를 받아들여 5월 6일에는 교주 최시형의 이름으로 각처의 동학접주에 통문이 띄워졌다.

5월 10일 충청도 청산현(靑山縣) 소사리(小蛇里)에 집결한 동학교도의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고 그들은 곧 행동을 개시하여 공주목과 진잠현(鎭岑縣)의 경계인 성전평(星田坪)을 점거하고 이어서 회덕현을 습격하였다.

충청감사 조병호(趙秉鎬)는 우선 이민(吏民)과 보부상을 초모(招募)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은진 파수병 100명을 급파하는 한편, 충청병사 이용복(李容復)에 청주 영군 200명을 파병해 주도록 연락하고 다시 전주에 머물러 있는 초토사 홍계훈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 동안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지나간 공주·청주 이남의 여러 지방은 거의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이 되었으나 5월 14일에는 공주와 진잠 사이에서 갑자기 해산하고 말았다. 그 까닭은 교주 최시형이 무력으로 봉기하는 것을 꺼린 때문으로 여겨진다.

동학농민군이 전주 입성에 앞서 장성 일대를 휩쓸고 있을 무렵, 그들은 폐정개혁을 위한 13개 조목의 요구사항을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에게 제시하여 탐관오리의 배격과 외국상인의 침투를 반대하였다. 이러한 농민들의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봉건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요구는 사태의 진전에 따라 보충되고 또한 수정되어 주장된 것이다.

한편 초토사 홍계훈이 거느린 경군은 동학농민군의 뒤를 따라 6월 1일에는 전주성 밖에 이르러 서로 대치하는 상태로 들어갔다. 그 동안 6월 4일과 6월 6일의 두 차례에 걸친 양군의 접전은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나와 선제 공격한 출격전이었는데, 이번에는 동학농민측에 큰 피해를 준 패전으로 그쳐 도리어 전의를 상실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토사 홍계훈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학농민군에 대한 선무공작에 착수함으로써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는 고종의 윤음과 자신의 효유문(曉諭文)을 성내의 동학농민군에게 전하고, 탐관오리는 법으로 다스릴 것을 약속하면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원정서(原情書)를 두 차례에 걸쳐 양호순변사 이원회(李元會)에게 제시하였다. 제1차 원정서는 14개 조목으로 되어 있고 제2차 원정서는 24개 조목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그 일부가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이래 여러 차례 제시한 바 있는 개혁요구 조목과 중복되어 있으니, 대체로 탐관오리의 숙청과 개항 이후 나타난 외국상인의 횡포와 국내 특권상인의 배격, 그리고 물가등귀의 원인이 되었던 미곡의 국외유출 방지 등을 주장한 것이었다.

동학농민군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의를 상실한 상황 아래서, 전봉준은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는 강화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초토사 홍계훈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6월 10일(음력 5월 7일) 전주화약이 성립되고,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거한 지 10여일 만에 철수하고 모두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봉준은 2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전주와 인접해 있는 순창·남원에 남아 있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관군도 동학농민군이 해산한 지 며칠 뒤 강화병 200명만 남겨 전주성을 지키게 하고 대부분은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지나간 전라도 일대에는 치안과 행정이 거의 마비상태에 있었고 어떻게든지 복구되어야 할 형편이었다.

양호순변사 이원회는 6월 22일에 효유문을 내려 민폐의 근절과 관리의 탐학을 엄금할 뜻을 밝히는 한편, 각자 면리(面里)에 집강(執綱)을 두어 민간에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집강을 통해 영문(營門)에 호소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봉준을 그의 감영으로 초치하여 치안의 복구와 관민의 화합에 대한 방책을 상의하였다. 동학교도의 협력이 없이는 지방행정의 질서와 수령의 위신은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강소는 전라도 53주(읍)의 관아 안에 설치된 일종의 민정기관이었다. 이 집강소의 설치로 동학교도가 각 읍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은 사실상 이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전주에는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두고, 집강소에는 분장을 나누어 집강 밑에 서기·성찰(省察)·집사(執事)·동몽(童蒙) 등 임원을 두어 행정사무를 분담케 하였다.

전봉준은 수천의 동학교도를 거느리고 금구·원평 등지를 근거로 하여 전라우도를 관할하고,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로 하여 전라좌도를 관할하였다. 그리하여 수령들은 형식상의 지위에 지나지 않았고, 또한 서리들은 모두 동학에 입적(入籍)을 해야만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집강소에서는 동학농민군의 봉건제 개혁요구였던 폐정개혁도 추진하였는데, 그 요강은 이 때까지의 주장이 수정 정리된 12개 조목으로 되어 있다. 이 조목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일부 학자에 의하여 부정되고 있으나, 동학농민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던 동학교도의 기록이며, 이보다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장되었던 강령·격문·포고문·원정서 등의 내용과 크게 다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개혁안 제시를 간략히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탐관오리의 숙청, 동학농민군의 참정권 요구, 양반토호들의 탐학 배격, 토지재분배의 요구, 노비해방 등 반봉건적 개혁요구와 일본세력의 배격 등 1884년 갑신정변 때의 개혁 정강보다도 혁신적인 주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칠반천인(七般賤人)의 대우개선도 요구하여 노비해방과 함께 모든 천민의 해방을 추진하였다.

한편 집강소에서는 그들이 제시한 12개 조목의 개혁안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따랐다. 이미 관에서 작성된 문부(文簿)를 그들 자신이 검열하여야 했고, 농민들의 소장(訴狀)도 처리해야 하였다.

동학교도들은 이미 전주성에서 철수하여 각자의 출신지로 돌아갔을 때 마을마다 포(包)를 설치한다는 구호로 조직망을 침투시키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더욱 포교에 힘써 전라도에서는 청소년의 대부분이 동학에 입교하여 접(接)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추세는 주변의 각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쳐 동으로는 경상도 일대, 북으로는 충청·강원도는 물론 경기·황해·평안도에까지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이보다 앞서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동학농민봉기를 진압하는데 어려움을 깨닫고 먼저 청국에 대한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거한 전후의 일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요청은 원세개(袁世凱)를 통하여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전해지고, 그는 즉각 파병을 명하여 섭지초(葉志超)로 하여금 6월 8일과 12일 사이에 아산만에 도착하게 하였다.

한편 청국이 톈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조선파병을 통고해 오자, 일본도 즉각 파병을 청국에 통고하는 동시에 일본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서 12일 사이에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이리하여 조선을 둘러싸고 청·일 양국 사이에 전운(戰雲)이 짙어져 갔다.

국내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전봉준으로 하여금 집강소에서 정세만 관망할 수 없게 하였다. 더욱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이 신정권을 세웠다는 소식은 그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분노를 일으켜, 그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다시 봉기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9월 중순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면서 기포(起包)하자, 이에 호응하여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10월 말을 전후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11만에 가까웠으며, 이는 집강소를 통해 연락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의 동학교도인 북접은 처음 종교적 입장을 고수하여 무력항쟁에 가담하기를 꺼리고, 남접의 전봉준 등을 가리켜 ‘국가의 역적이며 사문(師門)의 난적’이라고까지 극언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접주들의 권유를 받은 오지영(吳知泳)이 그 조정책에 나서 항일구국투쟁이라는 명분 앞에 남·북접을 화해시켜 공동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손병희(孫秉熙) 지휘하의 1만 명에 이르는 북접의 동학농민군이 청산(靑山)에 집결하고, 곧 남·북접이 논산에서 합세하여 공주로의 북상계획을 세웠다. 11월 하순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해 있을 무렵 그 밖의 여러 지방에서도 산발적으로나마 항일전이 벌어졌는데, 목천·세성산(細城山)은 김복용(金福用)·이희인(李熙人) 등이, 수원은 김정현(金鼎鉉)·안승관(安承寬) 등이, 홍천은 고석주(高錫柱), 공주는 최한규(崔漢圭), 옥천은 정원준(鄭元俊) 등의 동학접주들이 점거하였다.

한편 남·북접의 동학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하였다는 소식은 충청감사 박제순(朴濟純)에 의해 정부에 보고되고, 곧 관군을 출동시키자 일본군도 이어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11월 하순에 이르러 전봉준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으나 상당수가 이탈하여 북상한 수는 겨우 1만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밖에 북접의 김복명(金福明)이 거느린 동학농민군 1부대가 목천 세성산에 포진하고 있었고, 일본군이 남방 해상으로부터 상륙할 것에 대비하여 손화중부대는 나주에, 김개남부대는 전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처음으로 접전을 벌이게 된 것은 11월 27일목천 세성산의 전투였는데, 여기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김복명이 붙잡혀 죽고 사상자 수백 명을 내고 패배하였다.

동학농민군을 서전에서 참패시킨 일본군과 정부군은 공주로 진격하여 전자는 우금치(牛金峙)에, 후자는 이인(利仁)과 효포(孝浦)에 진을 쳤다.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하던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노성읍(魯城邑)에서 공주의 경천점(敬天店)에 이르는 지역까지 이인역(利仁驛)으로 전진하였고, 다른 부대는 효포(孝浦)에 다다랐으며, 또 다른 부대는 공주 동쪽 30리 지점인 대교(大橋)로 나아가 공주를 포위하였다.

전봉준은 공주성 공격을 결행하기 위하여 전주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과 광주지방의 손화중에게 통문을 보내 북상, 내원하도록 요청하였다. 11월 29일 이인 방면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정부군과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이튿날 이두황(李斗璜)이 거느리는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 효포로 진격하려던 계획이 일단 저지당하고, 양군은 공주를 앞에 두고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12월 11일 동학농민군은 웅치(熊峙) 방면에 대한 총공격을 가하였으나 도리어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양군 사이에는 혈전이 벌어지고 끝내 많은 사상자를 내고 공주 남쪽 30리 지점의 경천점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이 이곳에서 6, 7일간 머물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동안 김개남의 동학농민군 5,000명이 북상해 옴으로써 합세하게 되자 기세를 돌이키게 되어 다시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정부군은 공주의 공주 본영과 계룡산 뒤편인 판치(板峙)와 이천역 등으로 병력을 3진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었는데, 우선 동학농민군이 판치 방면을 공격하자 정부군은 쫓겨 우금치에 있는 일본군 진영으로 후퇴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다시 우금치로 육박하자 이곳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우금치의 공방전은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운명을 건 일대혈전이었다. 그러나 6, 7일간에 걸친 40∼50회의 격전을 치르는 공방전 끝에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하고 노성·논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1만여 명의 병력 중 겨우 살아남은 500여 명으로 항전을 거듭하면서 전주·태인을 거쳐 금구·원평까지 후퇴하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모두 해산하였다.

한편 김개남의 동학농민군부대도 북상하여 청주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다시 전주로 후퇴하고 여기서도 공격을 받아 태인 방면으로 패주하다가 김개남은 붙잡히고 말았다.

또 손병희의 북접 주력부대는 순창에까지 몰렸다가 본거지인 충청도로 북상하였는데 여기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습격을 받고 마침내 충주에 이르러 해산되었다. 그 뒤 일본군과 정부군에 쫓기고 있던 전라도지방의 동학농민군은 한때 순천에 집결하여 여수의 좌수영을 향해 진격한 바 있으나 오래지 않아 패배하여 해산되었다.

이 무렵 강원도에서도 동학교도가 봉기하였다. 10월 초 영월·평창·정선에서 수천 명이 일어난 것을 신호로 강원도의 각 지방에 그 세력이 미쳤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섬멸작전에 의해서 대부분 그 지도자인 동학의 접주·성찰 등이 체포되어 효수되자 이내 해산되었다.

황해도에는 동학이 비교적 널리 포교되어 있어서 1893년의 보은집회에 황해도의 동학접주가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황해도에서 동학교도가 크게 봉기하게 된 것은 1894년 10월 하순 장연에서 수만 명이 일어나 해주성을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재령·안악·평산·봉산·신천 등지에 세력이 미치었으나, 이것 또한 일본군과 정부군의 합동작전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다른 한편 금구·원평 방면으로 후퇴하였던 전봉준은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기를 다짐하던 중 1894년 12월 30일 밤 불의의 습격을 받아 관군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듬해 4월 23일전봉준은 김덕명·성두환(成斗煥)·최영남(崔永男)·손화중 등 동지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최후를 마쳤다.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었고, 그 맥락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하하는 동북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조선사회의 혼란은 더욱 가중화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일어날 조짐이 나타났다. 급기야 그것은 1894년(고종 31)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고종 31) 갑신정변 때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민씨 정권이 청군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진압하자, 일본은 일본대로 청이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을 원점으로 되돌렸던 고종 집권 초기 조선은 각종 사회혼란과 정부권력자들의 무능 그리고 이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민심은 동요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고부군 농민들은 무력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그 전에 이미 1882년(고종 19)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고종 31)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고종 31)의 제1차 농민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주도한 무장개혁 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흥선대원군을 받들고 새 정부를 세우려 했던 좁은 의미의 정치혁명이었다.

갑오농민전쟁에 동학 교도들과 농민들 외에 양반 사대부와 지식인층이 가담하고, 불교 승려들까지 가담했다는 사실을 접한 흥선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고종과 명성황후를 타도할 계획을 수립한다. 정치 문제에 휘말리기를 꺼려한 북접을 제외한 남접과 서포는 모두 부패한 탐관오리와 척신을 싸고도는 왕비를 원수처럼 여겼으므로 대원군은 이들을 이용, 명성황후를 처단하고 이준용을 추대하기로 작심한다.

1894년(고종 31)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하자 대원군의 귀에는 농민들이 대원군을 부르짖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대원군은 밀사를 파견하여 농민군 지도부와 접촉했다. 1894년(고종 31) 2월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이용하기로 하고 교섭을 시도한다. 동학 남접의 주요 지도자의 한 사람인 전봉준이 한때 흥선대원군의 운현궁 식객이었던 점도 이들 양자 사이의 연결을 주선하는 역할을 하였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년(고종 30)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농민들은 전라북도 관찰사에게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역시 대답을 받지 못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어 일부 농민과 동학도들은 무기와 화약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세금이 인상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조병학은 오히려 전창혁에게 심한 매질을 가해 버렸고 전창혁은 귀가한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천 냥의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 한편 조병갑은 중앙 조정에도 뇌물을 바쳤다. 중앙 조정에 바치는 뇌물은 의례적인 것으로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군수나 현감, 부사, 관찰사는 얼마 못가 파직되는 반면 정부에 막대한 돈을 헌납하는 자를 군수나 현감, 부사, 감사로 임명하면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1893년(고종 30) 12월부터 1894년(고종 31)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된 이래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은 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하였다.

한편 1893년(고종 30)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고종 30)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1864년(고종 1) 조선정부는 동학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이에 분격한 농민은 한문교사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올라가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892년(고종 29) 전봉준이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였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형별을 가하였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값을 받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농민들에게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어처구니없는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1893년(고종 30) 말부터 1894년(고종 31) 1월 초, 거사를 앞두고도 남접 내부에서도 거사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쉽사리 단안을 내리지 못했다. 남접의 실력자인 손화중 역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전봉준은 ‘이런 저런 부패가 있는데 어찌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우리 국민으로써 어차피 피해 다니면서 교를 형성하고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차에 이 기회에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것 아니요. 취지가 맞다고 생각하면 다 같이 동참해서 힘이 되어 주시고, 접주님이 주관을 해주시요.’라고 하였다.

그런데 손화중은 곧바로 승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더 있으면 자연히 그럴 때가 닥칠 수 있다. 그때를 맞춰서 해야지 지금 해서는 안 된다.’며 전봉준을 설득하였다. 농민 운동 거사 직전에 동학 내 강경파였던 남접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은 김개남 등의 개남국왕설 소문이나 전봉준 일파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한 것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을 압박하자, 최시형 등은 처음에는 협상론인 화전론(和戰論)을 펼치다가, 마침내 현실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북접을 전봉준의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시켰다. 인심이 즉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 고로 너희들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 이로써 교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도의 큰 뜻을 실현시키라! 이로써 손병희 등이 이끄는 북접이 남접과 힘을 합쳐 봉기에 가담했다.

제1차 봉기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고종 31) 2월 15일(음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관의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봉준은 그 전날 밤에 태인의 최경선과 함께 3백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40리 길을 행군하여 말목장터에 미리 당도해 있었다. 대열을 가다듬은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그 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첫 전투의 최고 지도자는 전봉준 외에도 남접에는 손화중이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고, 서포에는 서장옥이 최고 지도자였다. 무장 기포에서 황토현 전투까지는 손화중 등 각 접주들이 연합해서 싸웠는데, 황토현 전투 이후 손화중은 전봉준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전투는 당신이 다 관장을 하고, 그 자문은 나한테 얻어서 시행만 하시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농민들은 전봉준을 선두로 수백 명이 1894년(고종 31) 2월 15일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갔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줄행랑을 놓았다. 농민군은 관아를 습격·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하였다. 이는 무력 봉기와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의 거병 반대와, 농민군에 대한 초기의 방관적 대응도 작용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을 생포하는 일은 실패하였다. 조병갑은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전주감영으로 피신하고 없었다. 고부 관아가 농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按覈使)로 삼고, 용산현감 박원명을 신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조선 말기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개는 조정에서 안핵사를 보내면 평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화약을 청했고 동학 농민군 대표들과 면담 후, 동학 농민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고 동학 농민군은 자진해서 해산한다. 이것이 ‘제1차 동학농민운동’으로, 고부 봉기, 1차 봉기, 정월 봉기 등으로 부른다.

제2차 봉기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이 적극 호응하였음은 물론이다. 체포된 이후 전봉준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나 김개남은 대원군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자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민군이 자발적으로 해산되고 집강소가 설치된 후 전봉준은 20여 명으로 기마대를 조직하여 전라도 내 각지를 순회하며 집강소 설치를 지도하고, 개혁 정책의 실시 상황을 점검하였다. 그 결과 전라도 내에는 53군에 모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집강소의 원만한 운영을 협의하기 위해 전봉준을 전주 감영으로 초청했고, 감영 내에 대도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동학 세력의 힘을 두려워한 전라 감사는 자신의 집무소인 선화당을 대도소로 내주고, 자신은 그 곁의 작은 건물로 옮겨갔다. 그러나 집강소의 설치 과정에서 양반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들은 집강소의 행동 강령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을 문제 삼았다. 행동 강령 속에 ‘빈부의 차이를 없애고 상전과 노비의 구별을 없앤다.’, ‘또한 양반과 유림의 방자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양반들은 이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강소는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므로 양반과 유교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양반 세력이 강했던 나주, 남원, 운봉의 세 곳에는 좀처럼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했다.

이에 전봉준은 마침내 무력으로 집강소를 설치할 것을 결심하고 김개남, 김봉득, 최경선 등에게 각각 3천 명의 병력으로 남원, 운봉, 나주를 접수하도록 했다. 남원과 운봉은 쉽게 함락해 집강소를 설치하였으나 나주의 저항은 완강하였다. 나주 관아에는 많은 동학교도들이 붙잡혀 있었고, 또한 나주 목사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최경선은 나주 입성을 감행하지 못했다. 이 보고를 들은 전봉준은 단신으로 나주 목사를 만나 그를 설득하고 동학교도들을 석방시킨 뒤 나주에 집강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학의 자치 행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청군과 함께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은 힘으로 내정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이 때문에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4천 년간 중국의 반 속국으로 존재했던 것에 상당한 불만을 품었던 개화파 정치인들은 일본을 적극 지지하였다. 또한 일부 개화파는 일본을 이용하여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서 빨리 개화, 변혁을 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동학 농민군 세력이 강성해지자 경계심을 느낀 왕비 민씨는 청에 도움을 요청, 청군을 이용해서 이들을 진압하게 한다. 또 1884년(고종 21)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 역시 군대를 조선에 파견시킨다.

이때 안경수, 민영준은 청일간의 외교 교섭을 통한 난의 수습에 적극 앞장섰다. 민씨 정권은 일본과 청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관군과 함께 ‘동비 색출’에 나선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장악하였다.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은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한 번 봉기했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궐기 목적에 폐정개혁과 민씨 척신세력 처벌, 대원군 옹립이라는 조항이 들어있음을 접한 민비는 동학군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을 계획한다. 또한 양반 사대부들은 최제우가 사이비 종교를 만들다가 혹세무민한 죄로 처형당한 것을 근거로 들어 동비들을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 그리고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충청도의 노론 위정척사파 계열 양반들과 보수적인 영남 남인들은 자체적으로 의병을 창의하여 동학군과 교전을 벌였다.

제3차 봉기

1894년(고종 31) 9월 전봉준, 김개남 등은 다시 사발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하였다. 전라도, 충청남도 등지에서는 남접과 서포 소속 동학군과 농민군이 궐기하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교주 최시형의 북접에 도움을 청해 연합 전선을 폈다. 이때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을 합해 약 20만 병력이었다.

동학 농민군의 일부가 흥선대원군과 내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씨 내각의 조선 조정은 농민군을 제거할 계획으로 일본과 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최경선, 김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천민, 김봉득, 김봉년, 유한필 등이 전라북도 전주부 삼례읍에서 다시 새로운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분격한 농민군은 이 해 음력 9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하였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 항쟁한다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이를 ‘제3차 동학농민운동’으로, 9월 봉기 또는 제3차 봉기, 삼례봉기로도 부른다.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23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은 청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홍성 농민군은 금강 건너편의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만여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농민군은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 새벽,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농민군은 논산으로, 다시 전주로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원평, 태인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역시 패했다. 전보운은 직속부대만 남기고 농민군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

곧이어 정부군 측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죄없는 양민까지 마구잡이로 체포, 학살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부녀자를 능욕했다. 백양사에 숨어 동정을 살피던 전봉준은 정부군이 살육에 정신없는 틈을 타서 직속부대를 서울로 잠입케 하고 세 명의 부하와 함께 순창으로 갔다.

동학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전봉준은 정읍과 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몸을 숨겼다. 그러나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역사 NIE] 동학농민운동은 왜 대일 무장투쟁이 됐나

올해는 동학 농민 운동(1894)이 일어난 지 120년 되는 해다.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이 중심이 돼 부패한 정부에 맞서 봉건적 사회 질서를 바꿔보려 했던 개혁운동이다.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던 일본에 맞선 무장 투쟁이기도 하다. 비록 1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동학 농민 운동에서 제기한 개혁 요구가 같은 해 갑오개혁에 반영되는 등 영향이 적지 않았다. 또 당시의 대일 투쟁 경험은 향후 항일 의병운동으로 이어졌다. 동학 농민 운동의 주역은 전봉준이다. 교과서와 언론이 전봉준과 그가 이끈 동학 농민 운동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전봉준(1855-1895)

전봉준은 전라도 고부(현재의 전북 정읍)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한문과 한시를 배운 덕에 한때 서당 훈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형편이 어려워 경제적으론 평민이나 다름 없었다. 당시 농민 사이에선 평등을 강조하는 동학이 확산되고 있었다. 전봉준도 30대에 동학을 받아들여 전북 지역 동학 지도자가 됐다. 전봉준의 아버지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저항하다 곤장을 맞고 앓다가 숨졌다. 이처럼 고부 군수의 수탈이 심해지자 전봉준은 1894년 1월 고부 농민들과 봉기했다. 이게 동학 농민 운동의 시작이다. 농민군에 대한 탄압과 일본의 국권 훼손에 맞서 전봉준은 같은 해 3월과 9월에 더 큰 규모의 농민 봉기를 두 차례 더 일으켰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뒤 12월 체포돼 이듬해 사형 당했다.

정치적 라이벌, 부패 관료와 일본

1. 전봉준 생가 2. 1973년 동학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만석보유지비. 3. 전봉준이 각 마을 동학집강소에 돌려 궐기를 촉구한 사발통문. 주모자를 가려내지 못하도록 원둘레에 각자 서명했다.

고부 농민 봉기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이었다. 세도정치가 지속되면서 지방관의 부정부패는 극심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도 그랬다. 당시 농촌에선 보를 만들어 여기에 농업 용수를 가두어 놓고 썼다. 조병갑은 이미 사용 중인 보를 허물고 농민을 강제 동원해 만석보(萬石洑)를 새로 쌓은 뒤 수세(水稅)를 농민들로부터 거둬 개인적으로 부를 축적했다. 뿐만 아니다. 교학사는 “조병갑이 대동미를 징수할 때 좋은 쌀을 징수해 조정에 상납할 때는 나쁜 쌀로 바꾸어 차액을 착복했다”고도 적었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과 고부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해 억울하게 옥살이 하던 사람들을 풀어줬다. 또 횡포를 일삼던 아전을 처벌하고, 관아의 곡식을 풀어 농민에게 나눠줬다.

고부에서 일어난 봉기가 전국적 농민 운동으로 번진 데엔 피폐한 농촌 경제가 작용했다. 여기엔 일본 상인의 한반도 진출도 한몫했다. 리베르는 “일본 상인들은 영국산 면제품을 수입해 조선 상인들에게 팔고 쌀을 대량으로 매입했다. 면포 수입이 증가하고 곡식 값이 폭등했다. 황해도와 함경도에선 방곡령이 내려질 정도로 피해가 극심했다”고 썼다.

고부 봉기 직후 정부 측이 봉기 가담자를 처벌하려 하자 전봉준은 이웃 지역 동학 지도자인 손화중(1861~1895)·김개남(1853~1895)과 함께 3월에 더 큰 봉기를 일으켰다. 제1차 농민 봉기다. 전봉준은 농민군 대장이었다. 농민군은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라성을 점령할 정도로 큰 위세를 떨쳤다. 이에 놀란 정부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 군대가 충남 아산만에 상륙했고, 일본군도 자국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들어왔다.

사태 악화를 우려한 농민군은 정부와 급히 타협해 전주화약(농민군이 전주 점령 후 정부와 맺은 조약)을 맺고 내부 개혁에 동의했다. 정부는 청·일에 철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군을 거부하고 6월에 경복궁을 무단 점령했다. 이어 동학군 진압에 적극 개입하는 동시에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한반도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했다.

동학 농민 운동 세력은 반외세, 특히 반일 성격을 명확히 밝혔다. 1차 봉기 당시 내놓은 4대 강령에선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고 했다(금성출판사). 전주화약 당시 정부에 제시한 폐정개혁안에도 ‘왜와 통하는 자는 엄중히 징벌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전봉준은 체포 뒤에도 봉기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일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래엔은 전봉준이 체포된 뒤 그를 심문한 기록인 ‘전봉준 공초’를 싣고 있다. 여기서 전봉준은 “전주화약 이후 다시 군대를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냐”는 심문자의 질문에 “일본이 개화를 구실로 군대를 동원해 왕궁을 공격하고 임금을 놀라게 했으니, 충국애군의 마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싸워 그 책임을 묻고자 함이다”라고 답했다.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과 정부군에 패한 것은 화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교학사는 독립운동가 황현(1855~1910)이 쓴 『오하기문』을 인용해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 책에서 황현은 ‘우리나라 총의 사정 거리는 100보 정도에 불과하지만, 일본총의 사정 거리는 400∼500보도 더 되었다. (일본군은) 적의 총탄이 미치지 못할 것을 헤아린 다음 비로소 총을 쏘았으므로 적은 빤히 쳐다보면서 감히 한 발 쏘지 못하였다’고 적었다.

법정으로 출두하는 전봉준(왼쪽에서 세번째). 체포과정에서 다리를 다쳤다.

개혁과 항일의 씨앗을 심다

고부 봉기(1월), 1차 봉기(3월), 2차 봉기(9월)에 이르기까지 동학 농민 운동은 줄곧 반봉건, 반외세 성격을 띄었다.

1차 봉기 때 내건 4대 강령에서 농민군은 ‘충효를 다해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고 발표했다. 전주화약 당시의 폐정 개혁안에서도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쫓아낼 것’ ‘지방관은 자기 관할 지역에서 장례를 치르지 말고 논도 거래하지 말 것’ ‘아전을 임용할 때 뇌물을 받지 말고 쓸 만한 사람을 골라 임용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했다. 당시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폐정개혁안에서 ‘노비 문서를 소각할 것’ ‘천인 차별을 개선할 것’ ‘젊어서 과부가 된 여성의 재혼을 허용할 것’ ‘토지를 균등히 나누어 경작하게 할 것’ 등을 담아 신분제 폐지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각 교과서는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 “농민층이 신분제 폐지 등 전통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개혁을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리베르)이라거나,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과 동학교도의 지도하에 민중이 가세하여 일어난 농민 운동”(교학사)이라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근대 국가 건설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리베르·미래엔)거나, “근대무기로 무장한 일본을 물리치기엔 역부족이었다”(천재교육)는 한계도 지적한다.

최근 언론은 전봉준을 언급하며 정부가 백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한다.

“농민들의 외침 속엔 근본적인 염원이 담겨 있었다. ‘토지를 평균 분작하고 신분제를 폐지하라’는 그들은 더 이상 낡은 체제의 모순과 억압을 견뎌낼 수 없다고 외쳤다”(중앙일보 2014년 1월 2일 18면 ‘다시 갑오년, 한반도는 안녕한가’)

“진정으로 위대한 영웅이란 자신의 생명과 사익을 포기하면서까지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 혁명군은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고 시정개혁을 요구했는데, 삽과 괭이로 무장한 농민군을 한양의 관군이 투입되고도 진압하지 못할 만큼 조선의 군대는 무기력하기 그지없었다”(중앙일보 2013년 12월 24일자 11면 ‘사회 발전시키는 원동력 이타주의’)

QR코드를 찍으면 전봉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도 항일운동이다

지난해 5월11일 오후 서울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서 열린 제127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들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국 프리즘]

오는 5월11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다. 128년 전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동학농민군이 전북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에서 관군과 맞붙어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날이다. 2004년 3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14년이 지난 2018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법정기념일로 정해졌다.

특별법에 따라 꾸려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가 2009년에 펴낸 백서에는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변화시키고 근대 민족국가 수립의 단초를 제공한 민족적 대항쟁으로 의병활동, 3·1운동, 4·19혁명 및 민주화운동의 모태가 됐다. 그러나 한동안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 등으로 왜곡·평가절하돼 왔으며, 이를 바로잡고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특별법이 제정됐다”고 밝히고 있다.

특별법(제2조)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말한다”고 정의한다. 2차 봉기가 항일운동의 하나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심의위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서훈을 추진했지만,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가운데 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가 인정돼 훈장이나 포장을 받은 이는 단 한명도 없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12일 국회 정무위원회 이정문 의원(충남 천안병·더불어민주당)이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2차 동학농민혁명(1894년 9월) 참여자들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취지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에 따라 1894년 9월 2차로 봉기한 혁명 참여자로 결정된 사람을 포함한다”는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의원 60명이 공동발의한 개정안 제안 이유는 현 독립유공자법이 독립유공자 적용 시기를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해방되기 전인) 1945년 8월14일까지’로 정의하고 있고, 1962년 당시 공적심사 내규에 ‘일제의 국권침탈 시기를 1895년 을미사변부터’라고 정해 놓고 지금까지 을미의병에 가담한 양반·서생들만 서훈한 채, 그보다 1년 앞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배제해왔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제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희생이 컸던 동학혁명 희생자들이 제대로 된 평가와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2020년 10월15일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장에서 당시 민주당 민형배 의원과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이 이 문제를 따졌다. 성 의원은 “동학혁명, 1894년 8월에 갑오의병이 일어나고 그 1개월 뒤에 2차 동학혁명이 나는데, 또 그 뒤 1895년 10월에 을미의병이 나서 동학혁명이 가운데 위치합니다. 교과서에도 다 독립운동으로 기술돼 있습니다. 독립운동으로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데 교과서하고 굉장한 언밸런스(불균형)가 나잖아요”라고 말했다. 이에 박삼득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동학 문제는 여러 분들한테 얘기를 들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보훈처에서 2002년에 심의하고, 학자들의 의견이 시간을 더 가져야 되겠다 하고…. 그 뒤에 좀 소홀한 부분이 있습니다. 의견을 더 듣고 정리해서 하여튼 추진을 분명히 하겠습니다”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분명하게 추진한다던 후속 조치에 관한 소식은 아직까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독립유공자법 개정안이 통과돼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혁명 2차 봉기 참여자들이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안 된 것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한국사 교과서 검인정 9종은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항일무장투쟁으로 가르쳐요.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고, 특별법에서도 항일무장투쟁 참여자로 정의하며 연구성과도 엄연한데, 납득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법이 바뀌어야 합니다.”

동학 농민운동

■ 동학 농민운동

배경 지배층의 수탈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 농촌 경제의 파탄, 동학의 교세 확장 전개 교조신원운동(삼례집회, 복합상소,보은집회) → 1차봉기(전주성 점령, 전주화략) → 집강소 설치(폐정개혁안 실천) → 2차 봉기(항일구국투쟁) 의의 농민전쟁 : 동학의 평등사상과 포접제 조직 → 우리 나라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농민운동(조직적 농민운동) 반봉건운동(제폭구민) : 노비문서 소각, 토지의 평균 분작 등 → 갑오개혁에 영향 반외세운동(보국안민) : 왜와 통한 자 엄징 → 잔여세력이 의병운동에 가담 한계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농민층 이외의 보다 넓은지지 기반을 확보하지 못함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동학은 1850년대 후반부터 그 세력을 키워왔다. 최제우가 혹세무민이라는 성리학적 명분에 의해 죽고난 이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동학은 그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필제의 난 등을 겪으면서 동학은 점차 사회, 정치 운동까지 가담하게 되었다. 1870년대의 동학은 흥선대원군 대신 친일적인 성향의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반봉건 운동을 일으킬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동학은 1862년 임술농민봉기 등 정부에 의해 크게 진압당해본 경험을 알고 있었다. 차분히 교세를 확장하고, 때를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이가 2대 교주 최시형이었다. 최시형은 이필제의 난이 실패한 이후 동학의 구조를 양반중심에서 농민중심으로 개편하고, 농민 스스로를 개혁의 주체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임오군란이 외세의 압력으로 실패하고, 갑신정변이 농민층을 배제하면서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도 동학은 더 이상의 정치적 논리에 쉽게 휩쓸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1894년은 뭔가 한번쯤 사건이 터질 만한 국내외적 분위기였다.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난지 30년이 지나면서 농민층의 불만이 쌓일만큼 쌓인대다가 청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인하여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농민들은 이미 부패한 나라를 씻어낸다는 반봉건의 이념에, 농촌 경제를 파탄시키는 청과 일본 등 외세에 대한 불만까지도 가득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시형은 참고 또 참고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종교운동을 표방하는 교주 최시형과는 다르게 독자적인 성향으로 활동하는 세력에 의해 일어났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사상은 최시형의 온건노선과는 다른 것이었다. 동학에서 당시 큰 세력은 전봉준, 황하일 등의 남접과 보은 집회를 연 최시형, 손병희 등을 북접이었다.

점차 정치적인 성격의 집회로 발전해가다.

동학농민운동은 1892년까지만 해도 비교적 종교적인 성격을 가진 집회가 열리곤 했다. 예로 1892년 전라북도 삼례집회에서의 요구사항도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이 주된 내용이었다. 1893년 서울 집회에서도 최시형 등 동학대표 40여명이 광화문 앞에서 <농민들은 동학이 결코 국가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운동을 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종교운동적 차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893년 3월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의 요구는 달라졌다. 농민들이 많이 모이면서 요구사항도 <농민들을 괴롭히는 일본의 축출과 탐관오리들의 숙청>으로 바뀐 것이지요. 물론 교조신원운동도 하였구요. 농민들의 요구는 이제 <척양척왜 : 서양도, 일본도 적이다>라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정부는 1893년의 집회가 보은, 금구 등에서 계속되자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종교운동이라면 달랠 수 있겠지만, 이제 주체세력이 현실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농민층으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죠. 동학의 운동은 점차 운동을 넘어 <개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혁명>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것이 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특히 전봉준 등의 남접 우두머리들은 최시형, 손병희 등의 북접의 우두머리들이 연 보은 집회와는 별도로 금구집회를 열어 집회 후 1만명의 농민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려고도 하였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아니였어도 동학농민운동은 언젠가는 일어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1880년대 이후 개화정책이 추진되면서 농민봉기는 점점 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에, 그 무리 4000여 인들은 전라도 전주 근방에 모여 감사에게 3개조의 요구를 제기하였다.

첫째, 국인 가운데 우리 당을 지목하여 사악함을 주창한다고 하면서 경멸하는 이가 있으니,

명령을 발하여 그 어리석음을 바로 잡을 것

둘째, 외국 선교사와 상인은 모두 나라에 해를 끼치는 것이니 속히 쫒아낼 것

섯째, 요즈음 지방 관리들이 포악하게 거두고 억지로 빼앗아 생민이 도탄에서 고통을 당하니,

마땅히 이들 지방 관리를 쫒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3개조를 들어주지 않는 동안에는 우리들 4000여인은 한 걸음도 이 곳에서 물러날 수가 없다고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고부에서 농민봉기가 시작되다.

동학농민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전라도 고부 지역이었다. 전라도 고부에는 만석보라는 저수지가 있었다. 당시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은 이미 저수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강 하류에 새로운 저수지를 만들고 가혹한 세금을 걷었다. 전봉준 등 고부 군민들은 2차례나 고부관아에 세금을 감면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강제로 쫒겨나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참을 수 없어 고부 군수인 조병갑을 죽이고 봉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일으킨 횡포가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탐관오리의 횡포가 만연한 시기였죠. 문제는 그 횡포를 바라보는 농민들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1893년의 집회를 여러차례 경험하고, 서로 의견을 나눌 시간이 많았던 농민들인 더 이상 참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때 농민들의 봉기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고,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이 농민들을 달래면서 하나의 헤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을 엄하게 다스리려고 하면서 문제가 다시 커졌다. 이용태는 민란의 주동자인 전봉준 등에게 역적죄를 적용하려고 하였다.

결국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농민 대표들은 백산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1차 동학농민전쟁을 시작합니다. 전봉준이 농민들을 모으기 위해서 만든 아이디어는 사발통문이었다. 사발통문이란,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원으로 이름을 적어 누가 지도자이고 주동자인지를 모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림을 보면 이름이 원으로 둘러 적혀있어서 누가 주동자인지 모른다

이때 도인들은 선후책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도소(집행본부)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순서를 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감을 효수할 것

1.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1.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의 것을 빼앗은 탐리를 공격하여 징계할 것

1.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로 바로 향할 것

이제 농민들을 모아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럼 백산의 격문과 농민들의 행동 강령을 한 번 볼까요?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本義)가 결단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요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强敵)의 무리를 축멸코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밑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수령(方伯守令)밑에서 굴욕당하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이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 호남창의대장소, 백산봉기문 –

첫째,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죽이지 마라!

둘째, 충과 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하라!

셋째,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를 깨끗이 하라!

넷째,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있는 자들을 모두 박멸한다.

– 동학농민군의 4대강령, 대한계년사 권 2, 갑오조 –

백산격문을 보면 전봉준 등이 봉기한 이유가 단지 고부라는 한 마을의 사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의 1차 봉기는 탐관오리를 축출하고, 나라를 제 자리에 되돌리겠다는 의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지역문제였다면 전국에서 농민들이 모두 모이는 대규모 전쟁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농민들은 사회의 모순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동학농민의 1차 봉기는 고을 단위의 봉기가 아니라 각 지역의 농민들이 힘을 합쳐서 중앙정부에 항거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농민군은 민란을 일으킨 후 당황하는 정부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다. 물론 핵심적인 내용은 <탐관오리의 처벌, 세금의 공정한 부과와 잡다한 세금 혁파>가 요구사항이었다. 또 균전사의 수탈을 시정하라는 것도 요구사항의 내용이었다.

균전사는 1890년대부터 정부에서 지금의 전라북도 서부(군산, 익산, 고창, 정읍을 잇는 황해 루트)의 11개 고을의 개간사업을 위해서 파견한 관리를 말합니다. 균전이란 말 그대로 토지를 균등히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균전사들은 왕실의 힘을 등에 업고 농민들을 괴롭혔다. 특히 개간 사업에 필요한 돈을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함부로 관리하고, 지대를 걷어가기도 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의 원인 중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나쁜 탐관오리들이 잡다한 세금을 핑계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 때문이었죠.

농민들은 장성전투, 황토현 전투에서 싸울 의욕이 없는 정부군을 격파하고 전라도의 중심지 전주까지 입성하게 됩니다. 실제 전라도 지방의 정부군은 농민군과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하였다. 지방군 자체가 농민들 중에서 착출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죠.

농민들이 전라도를 스스로 다스리다.

농민들이 전주를 점령하자 정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군대가 농민군에게 연전연패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지요. 정부는 바로 청에게 연락을 하여 원병을 요청합니다. 1894년 5월 청나라군이 조선에 입성하였다.

문제는 청과 일본이 갑신정변에 맺은 톈진 조약에 의해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자 일본군도 같이 충병하였다는 것입니다. 갑신정변 때 길게 서술한 톈진조약 기억하나요? 청과 일본은 조선에 출병과 철수를 상의하여 같이 처리한다는 조약이었죠. 우리나라 정부는 일본군이 조선에 오자 또 다시 당황합니다. 청을 통해 농민군을 진압하려다 일본이라는 여우새끼를 불러들이게 된 것이지요.

정부는 청과 일본에게 군사를 돌려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고, 농민군과는 타협으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농민과 타협하기 위해 고종이 농민들에게 했던 따끔한(?) 한마디를 살펴볼까요?

“관리의 탐학과 살상은 내 반드시 엄하게 징치하리라. 세상에는 대의가 있는 것이요 조정에는 명분이 있는 것이다. 어찌 진을 치고 기를 꽂아 창의라 내세우며 대의를 어지럽히는가? 너희들은 모두 양민이니 각각 집으로 돌아가 업에 편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들의 소원을 펴게 하리라. ”

– 고종 황제의 글 –

농민들 역시 청, 일본이 조선에 와서 설치는 것이 불안하였다. 농민군은 전쟁 50일만에 정부와 타협을 하였다. 타협의 조건은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사항의 일부를 들어주고,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한다는 내용입니다. 단, 농민들도 더 이상의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는 것도 추가됬다. (전주화약)

이제 농민들은 자유를 얻었다. 프랑스 혁명처럼 모든 사회를 뒤집어 엎어 버린 혁명은 아니였지만, 스스로 싸워 자신들의 요구를 현실로 바꾼 것입니다. 농민들은 전라도 전주를 중심으로 전라도 53곳에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교정청>을 설치하고 국가적인 개혁 사업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1894년 같은 해의 갑오개혁으로 일부 계승됩니다.

집강소 정강

1. 인명을 함부로 죽인 자는 벨일

1. 탐관오리는 뿌리 뽑을 일

1. 횡포한 부호배를 엄징할 일

1. 유림과 양반배의 소굴을 토멸할 일

1. 잔민 등의 군안을 불지를 일

1. 종 문서는 불지를 일

1. 백정의 머리에 폐랑이를 벗기고 갓을 씌울 일

1. 무명 잡세 등은 혁파할 일

1. 공사채를 물론하고 과거의 것은 모두 따지지 않을 일

1.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벨 일

1.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일

1. 농군의 두레법은 장려할 일

농민들은 12개조의 폐정개혁안을 발표하고 전근대적인 <구제도의 모순>을 바꿔나갑니다. 12개조의 내용은 대부분 사회체제의 개혁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12개조의 내용도 한번 볼까요? (내용 분석은 동학농민운동 4부할 때 몰아서 하겠다.)

12개조의 폐정개혁안

①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② 탐관 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③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⑤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⑥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⑦ 청상 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⑧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⑨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⑩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⑪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⑫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이제 1차 동학농민운동이 끝났다. 혁명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농민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몇 달도 가지 못한다. 바로 일본 때문이었다.

1차 농민전쟁의 결과

자, 이제 농민들의 1차 봉기는 끝났다. 농민들은 <집강소>를 구성하여, 스스로 자치를 시작하였다. 정부도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개혁을 약속하였다. 정부가 개혁을 위해 마련한 기구가 바로 <교정청>이었죠.

그런데, 여기서 은근히 헷갈려하는 부분이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 1894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중 어느 것이 먼저냐고 물어보면 다들 고민을 하더군요. 고민할 수밖에 없다. 답이 없으니까요.

동학농민운동은 1, 2차로 나눠야만 다른 사건들과의 개연성이 생깁니다. 교과서에서는 이 부분을 나누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헷갈릴 수밖에 없다.

정부에 대한 불신과 탐관오리 숙청, 부당한 조세제도 혁파, 토지개혁 등을 주장한 1차 동학 농민운동은 1894년 3월부터 5월까지입니다. 1차 동학운동은 전주화약을 맺으면서 정부와 농민들의 화해로 끝이 났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과 일본은 전주화약으로 동학농민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목적은 동학농민운동 때문이 아니라 <조선의 실질적 주도권>을 누가 가지는가였다.

특히 일본은 그동안 청과 나누어 왔던 한반도의 정치, 경제적 권리를 빼앗으려고 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속셈이었지요. 일본은 서울과 부산까지 연결하는 전기선을 가설하면서 전쟁에 대비하였고, 1894년 6월 경복궁을 무력으로 장악합니다.

일본이 경복궁을 장악하고 요구한 것은 조-청간 경제 무역을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요구는 <조청상민무역장정>의 폐기였지요. 일본은 또 우리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꾸며 아산만에서 청의 함대를 기습하여 청군을 몰살시켜 버렸다. 이 때 죽은 청나라 군사만 1200에 달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경북궁을 장악한 채로 조선에 개혁을 요구합니다.(갑오개혁) 189년 6월 23일 조선에 주둔하던 청일군이 전면전을 하였는데, 일본군이 압승을 거두었다. 이 때부터 1895년까지 청일전쟁이 조선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청일전쟁은 조선정부에게도 부담스러운 전쟁이었지만, 농민에게는 더욱 참혹한 전쟁이었다. 겨우 자유를 얻고, 농민의 힘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분위기를 일본이 망쳐놓은 것이지요.

갑오개혁도 처음에는 교정청에서 농민의견을 많이 반영하면서 진행되는 듯 하였지만, 교정청이 사라지고 일본이 개화파를 앞세워 군국기무처를 신설하면서 일본의 의견이 더 많이 들어가는 개혁이 되어 버렸다. 일본군은 전쟁을 이유로 우리 농민들에게 식량을 징발하고, 헐값에 조선인들을 인부로 채용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의 분노는 이제 탐관오리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죠. 동학농민의 2차 봉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1차, 2차 동학농민운동 사이의 7월 – 내정 개혁이 강요되다!

일본은 1차 동학농민운동이 끝날 무렵, 청과 전쟁을 하면서도 조선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죠. 한번 일본의 속셈을 분석해 볼까요?

1. 전주 화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주둔할 명분도 없었고, 청과 전쟁을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통해 조선을 보호하고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한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청일전쟁을 장기화하면서도 조선에 머물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2. 조선에 내정간섭을 하면서 조선의 발전을 위함이라고 말함으로서, 훗날 청,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우선적으로 침략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일본이 필요한 것은 조선 등 아시아 식민지였으니까요.

3. 조선의 개혁을 방해하는 청군을 몰아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청일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청군을 조선에서 영구히 추방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의 개혁의지를 청이 좋아할 리 없었다. 전주화약 후 일본군은 바로 서울에 침입하면서 <청>에게 청일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청이 보기에 일본의 속셈이 뻔하였으므로 이것을 거절하였죠.

일본공사는 바로 조선 정부에게 내정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개혁을 강요합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군이 선철수 해야 함을 강조하였고, 1,2차 회담을 열어 이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하였다. 이 때 개혁기구로 창설된 것이 바로 <교정청>이지요. 우리는 3차 회담을 하면서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고 우리 스스로 개혁을 하겠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당황한 일본은 경복궁에 무단침입을 한 뒤, 민씨 세력을 궁 밖으로 강제 추방하고 흥선대원군을 표면에 내세워 개혁을 추진하였다. 물론 흥선대원군은 허수아비였고, 개혁의 주체는 일본이 내세운 김홍집, 김윤식 등 개화파였죠. 이렇게 실시한 개혁이 바로 갑오개혁입니다.

농민들은 다시 일어나다!

1차 동학농민봉기 이후, 일본의 힘이 세지자 농민들은 긴장하였다. 그리고 그 일본이 조선 농민의 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농민들은 다시 일어납니다. 2차 동학농민봉기는 일본을 추방하기 위한 반외세 운동이었다.

“이 땅의 살아있는 동포에게 포고한다. 우리는 왜놈을 이 땅에서 축멸(逐滅)코자 다시 기포한다! 관 민을 불문하고 우리의 창의에 합세하는 것은 충의(忠義)요 이반하는 것은 반역(反逆)이다. 충의지사(忠義之士)는 모두 삼례역으로 모여라.”

– 2차 동학농민운동 출정문 –

“일구(日寇)가 구실을 만들어 병사를 움직여 우리 임금님을 핍박하고 우리 국민을 어지럽게 함을 어찌 그대로 참을 수 있단 말이오.…지금 조정의 대신은 망녕되고 구차하게 생명을 유지하며, 위로는 군부를 위협하고 밑으로는 국민을 속여 왜놈, 오랑캐와 연결하여 삼남의 국민에게 원한을 사며, 망녕되게 군대를 움직여 백성을 해하려 하니 참으로 그 무슨 뜻이오. ”

– 전봉준 격문(1894. 10) –

묵은밥은 새밥에 섞지 마소서.

묵은 음식은 반드시 끓여 드소서.

침을 뱉지말며, 뱉거던 반드시 땅에 묻으소서.

노변에서 대변을 보았으면 파묻고 가소서.

물을 끓여 먹고 구정물은 아무데나 버리지 마소서.

집안과 내몸을 하루에 두번씩 청결히 닦으소서.

그리고 춘추로 이회씩 정기적으로 사십구일기도를 하소서.

– 2차 동학농민운동 최시형의 통유 –

위 사료를 보세요. 2차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은 전봉준이 전라도 삼례에 투쟁본부를 두고 시작되었다. 전봉준은 동도창의소란 이름으로 조선민들의 거병을 촉구하였고,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해 농민군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남접의 지도자인 전봉준은, 1차 때부터 전국적 무력봉기를 자제할 것을 주장하였던 교주 최시형 등의 북접 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추구합니다. 최시형도 통유문을 발표하고 가세하였죠.

경주황오리에 고아로 태어나 가사여의치 않아 배움도 얻지못하고

이집저집 머슴살이 영일군오덕동 제지소에서 종이를 떴다

마북동검등꼴 화전민되어 신유년 서른다섯살 수운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늘님소리 듣고파서 가진고행 마다하지 않았다

허나나는 들을수 없었다

하늘님의 소리를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하늘님의 소리를 들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옳다 사람의 소리 곧 하늘의 소리구나

그때부터 천지가 열렸다 나는 쉬지않고 일했다

자나깨나 도인들의 고통을 나누며 죽도록 일했다

평생토록 보따리하나 걸머지고 조선팔도 도바리 아니 도망다닌 곳이 없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 최보따리 그 보따리엔 하늘님이 계셨다

이제 나는 그 보따리를 불사르고자 한다

개같은 왜적놈 총부리앞에 불사르고자 한다

이게 나의 천명이요 이게 너의 천명이다

나 너에게 이르노니 나는 이제 가노라

천명을 다하고 허나 나는 말한다

너는 너는 높이 날으고 멀리 뛰어라

너는 너는 높이 날으고 멀리 뛰어라

– 최시형의 기포 명령문 –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할 정도로 군사력이 막강한 일본군에게 열악한 무기를 가진 농민군은 점차 밀리게 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인 전주와 논산을 빼았기고, 금구, 태인 전투 등에서도 전봉준 군은 일본군에게 밀렸다.(우금치 전투, 태인전투) 또 농민들의 봉기를 자신들의 기득권을 뺏는 것이라 생각한 양반들이 농민군에게 저항함으로서 산발적인 농민군의 봉기(기포)도 실패로 돌아갔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잡혀 죽고 말았죠.

“나를 죽일진대 종로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가할진대 어찌 컴컴한 적굴속에서 암연히 죽이는가?

때가 오니 하늘과 땅이 다 힘을 합치는데 운이 가니 영웅이라도 어찌해볼 도리없다

나라위한 붉은 마음 그 누가 알리 교수대에서 헛되이 외로운 넋이 되려는가”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에 대한 탄식 –

새야새야 녹두새야

웃녁새야 아랫녁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함박쪽박 열나무딱딱

-녹두장군에 대한 노래 –

동학농민운동의 명칭은?

1894년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의 운동을 동학농민운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동학농민운동이란 말은 교과서에서 쓰는 말입니다. 개론서와 각 단체의 입장은 다릅니다.

먼저, 동학농민운동이 동학 교도들의 종교운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1894년 동학운동>이라고 합니다. 동학 교단과 비교적 보수주의적인 역사학자들의 입장입니다. 당시 운동은 최시형 등을 중심으로 한 동학이 주도하였고, 동학의 포접제, 집강소 등이 사건의 중심을 이루는 기구였기 때문에 동학운동이 맞다는 논리이지요.

그러나,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과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은 <1894년 농민전쟁>으로 부릅니다. 그 이유는 사건이 일어난 이유 자체가 사회모순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참여하여 사회적 모순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을 높이 사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세계사적 보편성과 연결시키는 입장에서는 <1894년 농민 혁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진행과 요구사항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 전쟁을 통하여 주변 강국들을 물리쳤던 반면, 농민 혁명은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해 좌절되었기 때문에 그 혁명성이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봅니다.

이러한 3가지 입장을 절충하여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 바로 교과서의 <동학농민운동>의 관점입니다. 동학, 농민, 혁명성을 고루 압축하여 교과서에 적절하게 실어놓았죠. 역사를 바라볼 때 교과서와 같은 만들어진 텍스트가 진리라는 입장은 정말 위험합니다. 왜냐면, 교과서 역시 결론을 내리기 힘들어 무난한 절충적인 입장에서 기술한 용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진정한 명칭은 무엇이 좋을 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칭을 그냥 사용한다고 할 때, 또 하나의 쟁점은 <누가 그럼 주도했는가?>라는 점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말은 동학, 농민이라는 두 주체가 이미 들어가 있네요.

<동학운동>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동학운동의 주체가 동학운동론자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최시형과 동학의 집행부들이 <동학>이라는 종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 흐름에 농민이 동참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죠. 따라서 <동학>을 앞장서 이끌어간 사람들은 몰락양반인 교조 최제우를 비롯한 지식인층이나 몰락 양반이라고 말합니다.

동학 농민운동은 원래 몰락 양반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농민의 문제로 확대되었고, 사회 모순이 심화되면서 국가적 문제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즉, 초기부터 집행부는 지식인과 몰락양반이었고, 그들은 동학의 핵심 교도들이었다는 것이죠.

<농민전쟁>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동학의 주체가 당연히 <빈민과 농민층>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동학은 단순한 사회 운동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 모순과 외세의 침략, 제국주의적인 자본이 들어오는 시점에서 발생한 <농민층>의 항쟁이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동학의 주체는 사회 모순에 피해를 입은 모든 농민, 상인, 도시빈민 들이었고, 그들이 주체였기 때문에 동학이 전국적인 전쟁이 될 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동학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학이 서양의 시민혁명과 같은 혁명이었기 때문에 그 주체도 당연히 시민이라고 주장합니다. 프랑스 혁명의 부르조아, 영국 혁명의 젠트리가 바로 혁명의 주체라는 것이죠. 동학은 부르조아적인 부농층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그 마지막 목표는 자본주의 국가의 건설이었고, 그것은 곧 반국가, 반외세를 지향한 시민혁명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동학이 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였는가에 대한 논쟁

동학을 <동학혁명>이라고 보는 입장의 사람들은 동학혁명이 서구 시민혁명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로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서양 시민혁명들과 마찬가지로 아래로부터 대중들이 일으켜 근대화와 자본주의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혁명을 일으켜 무기와 조직을 만들 수 있었던 일정 재산을 가진 부농층에 주목을 합니다. 그 이유는 아시아에서도 충분히 서양과 같은 시민혁명이 가능하였고, 정조와 같은 절대군주도 존재할 수 있었으며, 실학과 같은 정치, 과학혁명적인 사상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기 위함입니다.

동학을 <농민중심의 전쟁>으로 보는 사람들은 서구중심적인 세계사적 보편성과 시민혁명의 가능성을 부인합니다. 우리 역사를 굳이 서양이 제시한, 혁명 단계에 맞춰 해석할 필요도 없으며, 자본주의가 근대적 국가의 지표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농민들의 주장은 자본주의를 이룩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자는 반봉건, 반외세적인 성격이었다. 그런데, 반봉건이란 개화를 주장하자는 개화파에 반발한 것이었고, 반외세란 제국주의적 자본을 가진 청, 일본을 배척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동학은 반자본적인 운동이었을 망정, 자본주의를 위한 운동이 아니였다는 입장이죠.

폐정개혁안 12개조가 보여주는 동학농민운동의 성격

결국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수백개의 논문들이 얽히고 설켜 다양하고 상반된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과서는 그러한 의견들을 절충해서 제시할 뿐이지, 명확하게 결론을 내린 것은 없다. 교과서에 동학농민운동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 나오는 것도, 이러한 견해들을 한쪽 입장에서 정확히 기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근거는 결국 실제 사료입니다. 그 중에서 동학농민운동의 핵심을 보여주는 사례가 집강소 시기의 <폐정개혁안 12개조>입니다. 이 사료를 분석하면서 4파트로 나눠 기술했던 동학을 끝내도록 하겠다.

<폐정개혁안 12개조>

①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② 탐관 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③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⑤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⑥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⑦ 청상 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⑧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⑨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⑩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⑪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⑫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동학의 성격을 한마디로하면 반봉건적, 반외세적인 성격을 가진 운동이라는 점이다.

1조에서 보면, <정부와의 원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 자체가 동학도, 농민들과 국가가 서로 반목하는 사이었고, 국가가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지 못하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2,3,4조 역시 탐관오리 처벌, 횡포한 부호, 불량한 양반 을 말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과 당시 사회적 대립구조를 보여줍니다.

5조의 노비문서 소각, 6조의 천인차별 개선, 7조의 청상과부 개가 등은 구제도의 모순에 대한 혁파를 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에서 보여준 길드 폐지, 신분에 대한 차별 금지 등과 비교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강도 높은 개혁안들입니다. 신분제 폐지의 내용은 백성들로부터 이루어지는 개혁안의 핵심적인 내용이지요.

8조의 잡세 폐지는 농민들의 중요한 요구중의 하나입니다. 당시 국가가 농민에게 보여준 가장 큰 횡포였고, 농민들의 핵심요구 사항이 이것이었죠. 쉬운 말로 밥먹고 살 정도의 돈은 남겨주고 이득을 챙기라는 것이죠. 요즘으로 따지면, 비정규직도 먹고 살 것은 보장해달라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10조는 일본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네요.

11, 12조는 다른 개혁에는 볼 수 없는 농민들만의 개혁 내용입니다. 정부나 지배층의 개혁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독자적인 것이죠.

11조의 공사채를 무효로 한다는 내용은 가장 농민다운 발상입니다. 특히, 12조의 토지개혁은 농민들이 꿈꾸어왔던 이상적인 세상을 보여줍니다. 세금을 깍아주는 조세 개혁이 아닌 토지 자체를 공평히 달라는 것이죠. 그러나, 갑오개혁에서도 이 토지개혁만큼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다. 모든 기득권층은 보수층이든, 진보층이든간에 자신들의 토지를 개혁하여 농민에게 줄 정도의 아량이 있을리 만무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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