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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비유 #성장 #위로
참고도서
Gnilka Joachim, International Biblical Commentary Mark(국제성서주석, 마가복음), 한국신학연구소, 1985.
Jeremias Joachim, Die Gleichnisse Jesu(예수의 비유), 허혁 옮김, 분도출판사, 1988
Kistemaker Simon, The Parables of Jesus(예수님의 비유), 김근수, 최갑종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Marcus Joel, Mark(앵커바이블 마가복음 1), 류호영, 장성민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2016.
Oden C. Thomas \u0026 Hall A. Christopher ed, 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New Testament III(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III, 마르코복음서), 최원오 옮김, 분도 출판사, 2017.
Strauss L. Mark, Zondervan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Mark(강해로 푸는 마가복음), 정옥배 옮김, 도서출판 디모데, 2016.
Thielicke Helmut, The Waiting Father: Sermons on the Parables of Jesus(기다리는 아버지), 이계준 옮김, 컨콜디아사, 1989
김득중, 복음서의 비유들, 컨콜디아사, 1990
류모세, 열린다 성경 식물 이야기, 두란노, 2014
배철현, 인간의 위대한 질문, 21세기북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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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3가지 교훈 – 크리스천투데이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의미. 겨자씨. cPixabay.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겨자씨 비유를 사용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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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11/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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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의 성경 현장] 왜곡된 진실…겨자씨 – 국민일보

성경의 겨자씨 비유를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식물만큼 우리가 오해하는 것도 흔하지 않다. 겨자에 대한 오해는 히브리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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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kmib.co.kr

Date Published: 8/17/2022

View: 2008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막4:30-32)

그리고 비유의 핵심은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씨, 겨자씨가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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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halomvil.tistory.com

Date Published: 10/8/2021

View: 1659

[마태복음 비유] 겨자씨 비유(마 13:31-32) – 두란노 서원

{겨자씨 비유}에서는 {씨}가 직접 천국을 의미합니다. 다른 비유와는 달리 여기서는 비유의 중심이 농부나 그가 하는 역할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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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rn153.tistory.com

Date Published: 5/2/2021

View: 2708

겨자씨 비유 (마태복음 13:31-32) – 다음블로그

겨자씨 비유 말씀에서 항상 낮은 자세, 겸손한 자세로, 우리 주님 다시 오는 그 날까지 겨자씨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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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2/25/2021

View: 9910

겨자씨의 비유 – 네이버 블로그

겨자씨믿음의 기적은 바로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멸망으로 가는 인생이 생명을 얻어 하나님앞으로 가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심판에서 자유함으로 가는 인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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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13/2021

View: 285

천국비유 시리즈(2) – ‘천국과 겨자씨’

이 짧은 비유의 요점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공중의 온갖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큰 가지를 가진 나무로 자라나는 겨자씨 한 알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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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umcdetroit.org

Date Published: 9/15/2021

View: 801

겨자씨(mustard)씨 비유가 의미하는 것 – 묵상노트

겨자는 배추과의 일년생 또는 이년생 풀로서, 씨가 많고 향기롭기 때문에 양념과 약재로 사용되며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 이용된다. 겨자씨는 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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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ybiblenotes.tistory.com

Date Published: 5/13/2022

View: 4728

2019.6.9.겨자씨 비유가 보여주는 천국 – 맨하탄한인교회

겨자씨 비유가 보여주는 천국. (눅 13:18)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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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manhattan.org

Date Published: 4/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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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로고스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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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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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막4:30-32)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마가복음 4:30–32(NKRV)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기 위해서 겨자씨를 언급하십니다.

여기서, 겨자씨에 담긴 의미는 작은 씨입니다. 그리고 비유의 핵심은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씨, 겨자씨가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 나라를 상상할때.. 지금은 작지만, “너 결코” 찬양의 가사처럼 “너는 결코 작지 않도다~” 라는 기대와 소망을 갖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1. 겨자씨의 정체

그런데, 겨자씨는 정말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을까요?

중고등부 시절,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이 보여주셨던 겨자씨가 생각이 났습니다. 작긴 작았는데 가장 작을까? 싶은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찾아보니 과학적으로 정말 가장 작은 씨는 아니라고 합니다. 더 작은 씨들이 있다는 거죠. (성경을 연구한다고 펼쳐놓은 책들이 이구동성으로^^)

Logos Bible Software

손바닥에 헤아리면 손가락으로 헤아려지는 깨 정도의 크기인것 같습니다. 학자들이 취급하는 겨자씨는 크게 2종류인데, 하나는 검은 겨자, 다른 하나는 노란 겨자입니다. 노란 겨자씨는 2mm 정도이고, 검은 겨자씨는 1mm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검은 겨자씨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라고 본다)

2. 겨자풀? 겨자 나무?

그런데, 겨자를 찾아보다가 더 놀란 것은… (이 겨자씨가 가장 작은 것이 아닐뿐더러) 우리가 나무 라고 상상하는 겨자 나무는 보통 보는 나무가 아니라 풀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에는 나무라는 이야기가 없지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는 나무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말이죠.

마 13:31-32(NKRV)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누가복음 13:18–19(NKRV)

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출처: Images of the Holy Land, Isachar, Hanan

이 사진에 노랗게 보이는게 바로 “겨자mustard” 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흔하게 볼수 있는게 이런 겨자 풀이라고 합니다. 제주도의 유채꽃과 비슷해 보이네요. 나무라기보다는 풀에 가까워 보이죠.

참고: 검은 겨자? https://ko.wikipedia.org/wiki/흑겨자

물론, 또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겨자나무로 보는 노란 겨자나무도 실제로 있다고 합니다. 다만 이 겨자 나무의 경우에는 씨가 좀 더 크니…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성경에서 말한건 겨자풀이지 않나 싶습니다.

3. 겨자씨 비유의 핵심

이쯤되면, 성경에 나온 비유가 어떻게 된거지? 하는 물음이 생길수 있습니다.

실제로 겨자씨는 1mm정도로 작은 편에 속하고, ‘겨자씨 한알만큼 작다’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에서 사용하는 관용어구였던 흔적이 있기에 예수님 당시에 겨자씨를 비유로 사용하기에 조금도 무리가 없다는게 학자들의 설명입니다. 또한 겨자풀은 크게는 약 3.66m(12피트)까지 자라고 그래서 뜨거운 이스라엘에서 겨자풀 그늘에 새들이 와서 앉는 것은 익숙한 광경이라고 합니다. 혹은 작은 새들은 겨자풀의 가지에 앉는 것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출처: Images from the Temple Dictionary of the Bible, Myers Richard.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내용은 “작은 겨자씨도 심겨지면 새들이 와서 쉴수 있을만큼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상상할때 고려해야 할 점이 생깁니다.

4. 겨자씨 비유로 알수 있는 하나님 나라

*겨자씨가 심겨 자라나는 나무가 울창한 숲의 거대한 나무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주의는 무척 달콤해보입니다. 힘이 세고, 돈이 많고, 언제나 이기는 편에 서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크리스챤도 예수님을 믿고 세상 정상에 서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이 겨자씨가 심겨져 자라면 “가장 큰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다른 새들이 와서 깃들일 정도로 그늘을 제공하는 큰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는 실망이겠지만 예수님은 그런 하나님 나라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작은 씨로 통용되는 겨자씨이지만, 심긴 후에는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를 냅니다. 다만 큰 나무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커진 겨자풀에도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여 쉴수 있으니까요.

사실, 생각해보면 겨자씨는 억울할수 있습니다. 가장 작지 않음에도 작다고 취급당하니까요.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작지 않은.. 최악이 아님에도 현실에서 외부의 시선을 통해 확인하는 체감하는 분위기는 이미 최악이고, 죽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안감, 두려움이 삶을 더 무겁게 하고 있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는 작아 보입니다.

그 작다고 여겨지는 하나님 나라가 심겨진 후에는 자라날 것입니다. 그냥 이대로 작은 채로 끝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울창한 편백숲을 이루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자라난 커다란 교회에서 최신식 영상과 음향이 갖춰진 곳에서 예배도 드리겠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저 2-3m되는 풀처럼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누군가 와서 생채기를 내면 아파하다 쓰러지는 상한 갈대 같아질수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 커지고 큰 가지를 낸 겨자씨의 변화된 모습은 공중의 새들이 그늘에 찾아와 머물 안식을 제공할 것입니다.

그래서 겨자씨 한알과 같다는 하나님 나라는 남들 보다 뛰어난 성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강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심겨지면 자라나는 생명력이 있고, 그 결과 내 것인것만 같던 삶에 누군가 찾아와 깃들여 쉴수 있는 샬롬이 있습니다.

5. 예수 그리스도가 왕되는 하나님 나라

이미 세상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기에 세상의 가치로 성경을 바라보는게 익숙하지만,

이제라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 겨자씨 비유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가 선명해집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칠때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시자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병고침을 원하는 사람, 귀신들린 가족이나 친구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많았고, 한쪽에서는 예수님이 귀신들렸음을 의심했습니다.

12명의 제자, 500명의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오늘날, 12명의 장로와 500명의 성도를 둔 어느 교회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우러러 보는 큰 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역도 세상에서 바라는 성공적인 큰 나무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시골에서 자란 예수님은 온 유대를 다니시며, 혹은 이방지역에도 찾아가셔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몸이 아픈 자들, 귀신들린 자들만이 아니라 마음에 말못하는 괴로움을 가지고 엇박자로 어긋난 신앙과 삶의 괴로로 고통하는 자들을 죄에서 자유케 하시고, 그들과 어울려 함께 잡수셨습니다.

6. 샬롬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오늘 대한민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 우리 가정안에 있는 소통의 어려움, 세계적인 갈등의 위협 속에서 힘과 성공에 대한 갈망이 짙어지지만, 그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왕되시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샬롬.

[마태복음 비유] 겨자씨 비유(마 13: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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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비유 하나님 말씀 중에서 겨자씨 비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겨자씨가 작지만 나중에 크게 자라서 많은 새가 몰려오게 됩니다. 복음은 처음에는 작은 것 같지만 나중에는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성도의 삶도 환난과 핍박이 있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크게 번성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겨자씨 비유(마 13:31-32)

마 1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마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장에 수록되어 있는 여덟 개의 비유 가운데 처음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모두 농부가 씨 뿌리는 광경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흥미 있는 사실은 세 비유가 모두 씨 뿌린다는 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지만 말하는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는 점입니다.

{씨 뿌리는 자 비유}에서는 씨가 아주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예수께서 전파하시는 천국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는 좋은 씨와 가라지라는 두 종류의 씨가 나옵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을 가리키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을 가리키는 비유였습니다. 이 비유는 둘 다 자랄 때까지 두라는 말씀이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심판이 연기되고 있습니다.

천국은 도래했지만 가라지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백성들은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 가라지 인지는 모릅니다. 누가 가라지인가를 구분하기 위한 노력은 불필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옵니다. 그때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유일한 구분 점은 열매에 있었습니다. 열매가 맺히면 알곡과 가라지는 여지없이 구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천국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천국 백성의 열매 맺는 삶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오늘도 주님은 우리 삶의 열매를 보시기 원하시고 게실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에서는 {씨}가 직접 천국을 의미합니다. 다른 비유와는 달리 여기서는 비유의 중심이 농부나 그가 하는 역할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의 비밀을 이해하려면 밭에 뿌려진 ‘겨자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한 농부가 밭에 갖다 뿌린 한 알의 겨자씨가 어떻게 변화되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예수께서 알리려고 애쓰셨던 그 천국의 한 다른 윤곽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 개의 씨 뿌리는 비유는 천국의 시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비유가 한결같이 말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비밀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를 돌아다니시며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치시고 회개를 촉구하실 때만 해도 천국이 이미 온 것인지, 아니면 문 앞까지 와 있기는 하지만 아직 이 땅에 오지는 아니하였는지 확실치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께서 전파하셨던 바로 그 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중요한 도입부라 할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렸다.”는 것은 천국의 말씀은 이미 여기저기 떨어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예수를 만나고 그에게서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 여부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거나 말씀을 잘 간직하고 실천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이미 뿌려진 천국의 말씀 때문에 환난과 핍박과 멸시와 유혹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천국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지금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좋은 씨를 밭에 뿌리는 자, 곧 인자에 비유된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천국의 자녀들을 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고 간 이 세상에서 천국의 아들들은 악한 자의 아들들과 함께 몸부림치며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아들들이 혼란한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한다는 설명은 천국이 정말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에서 한번 더 이 시작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씨를 뿌렸다”거나 “씨가 떨어졌다”는 표현은 역사 속에 시작된 천국의 분위기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천국이 나타났고 그 천국이 스스로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와 천국의 관계는 보다 더 긴밀합니다. 예수나 그의 사역을 천국이 나타나고 전개되고 발전해 가는 도구쯤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 긴밀성을 파괴하는 생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사역 자체가 바로 천국의 전개, 발전과정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천국의 도구나 동인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국을 상상할 때, 예수 없이도 그런 천국이 어딘가 있을 것처럼 동경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예수의 오심, 사람들을 부르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 등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신약시대의 천국은 예수와 관계된 다시 말해 기독론적인 무엇이라는 말씀입니다.

1. 겨자씨 비유(31-32절)

예수께서 천국은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심으로써 전하고자 하셨던 내용은 이 씨가 작은 것처럼 천국도 미세하게 시작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에 함축되어 있는 그 장엄하고 웅대한 분위기를 한마디로 부정하시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먼지 한 점 정도의 자리밖에는 차지할 수 없는 겨자씨, 그 작은 것이 천국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이런 천국을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런 천국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늘의 천군 천사와 함께 강림하실 화염과 우뢰의 하나님! 모세처럼 홀연히 나타나 억눌린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는 메시아! 이런 상황을 기대하던 그들에게는 천국이란 감히 인간의 머리에는 담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단어였습니다. 천국에는 위엄이 어려있었고 힘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전쟁과 평화, 억압과 자유, 심판과 상급, 저주와 축복,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 등 사람들은 이런 단어들을 천국과 결부시키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알리시려던 천국의 비밀은 정반대였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요 거의 흔적도 없는 것으로서, 보면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겨자씨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천국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밭에 씨를 뿌리듯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천국의 자녀들을 뿌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도 없이 혼자 오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가 머리 둘 곳도 없는 나그네로 오셨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세상과 이 온 세상의 만물을 만드신 분이 정작 이 세상에 와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며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천국은 갈릴리 한 구석에서 초라하게 시작된 행렬이었습니다. 나팔소리도 없이 오신 예수, 홍길동같이 구름을 타고 신나게 다니지 않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걸으시는 예수. 따라다니는 제자들에게 영광은커녕 진수성찬 한번 차려주지 못하는 초라한 예수. 이것이 밭에 뿌려진 겨자씨처럼 시작된 천국입니다. 위대한 천국의 역사적 발걸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나사렛 예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시작하신 일이 어떤 일인가를, 비유라는 그릇에 담아서 그의 제자들에게 만이라도 알려주시려 했습니다. 천국의 이러한 시작은 그를 믿는 사람에게만 겨우 감지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겨자씨 비유도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천국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기대한 대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천국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거부하는 원인을 명확히 진단하시고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천국이 아무리 미미하게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 시작은 참된 것임을 변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미세한 출발은 예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출발점이었습니다. 다른 천국은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의 이 의도가 자기변명과 격려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릅니다. 천국은 그렇게 초라하고 미미한 것으로 탄생했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기다리던 그 천국이었습니다. 이 하잘 것 없는 천국의 첫 울음소리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허황된 그리고 화려한 천국 관을 송두리째 무산시키고 맙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기대를 교정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여신 그 천국으로 따라오라고 제자들을 향해 손짓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교육하시려는 의도는 이 한 알의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는 말씀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이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말씀에서는 어떤 씨보다 ‘작은’ 씨와 ‘큰 나무’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미래의 ‘큰’ 모습이 현재의 ‘작은’ 존재를 잊게 합니다. 천국이 거의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에 들어왔다는 현실이 실망스럽지만 거대하게 성장한 천국의 모습이 이를 잊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미리 천국의 미래를 말씀하신 의도 중에 하나는 그의 제자들을 격려하시려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천국은 발전한다는 개념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장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어떤 나무보다 더 큰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이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천국은 한 구석에서 조용하게 시작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나중에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규모로 크게 자라나는 변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천국을 나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셨기 때문에, 천국이 겨자씨가 자라듯 발전한다는 개념을 나라의 확장이나 다른 영토를 정복하고 통합한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서 시작된 천국, 즉 그를 통해 천국의 아들들이 등장하는 그 광경을 지금 자신을 따라나선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실제로 보고 계셨습니다. 천국은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하늘나라의 비밀은 그가 계셨던 그 땅에서 하늘나라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시선은 특히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겨자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미미한 출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부정해서는 안 되는 유일한 출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꿈은 아주 원대했습니다. 두 명에서 네 명으로, 네 명에서 열 두 명으로 자라다가 시대와 시대를 거쳐, 그리고 장소와 장소를 넘어 엄청난 규모의 공동체로 자라날 것을 꿈꾸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국의 이 발전과정의 한 시점에 태어나 큰 나무로 자라나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거대한 나무의 한 작은 가지쯤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의 외침에서 태동하고 있던 그 천국이 모든 민족, 모든 시대, 모든 장소로 파고들어 가 천국의 아들들을 낳고 있습니다. 천국은 단번에 세상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죽어서야 겨우 가는 저 세상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천국은 예수의 사역으로 이미 현실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오늘도 변함없이 굴러가지만 천국은 이미 그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지 않았고 한 많은 이 세상은 유황불과 아마겟돈 전쟁으로 종말을 고하지도 않았습니다. 역사는 흘러갈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한 이질적 요소가 들어와 있습니다. 천국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섭리, 이런 것이 역사에 개입하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의 신적 통치는 점점 더 거대해지며 세상 전체를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종말이, 겨자씨의 성장이 멈추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외형적으로 보아서 현재 약 10억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나라 저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천국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역사 속에 드러난 천국의 조각과 앞으로 찾아올 또 다른 천국의 조각들까지 합친다면 천국은 어마어마하게 더 불어날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나무보다도 더 크게 성장한, 계속 성장하고 있는 천국 나무.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 거대한 하나님 나무의 한 부분으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혼자 부름을 받아 외롭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들은 아닙니다. 이천 년 동안 자라온, 그리고 얼마간은 더 자라날 겨자씨라 불리는 천국의 한 부분으로 오늘 이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비록 출발은 미미했지만 점점 커져서 전 세계와 전 역사를 채우고 마침내 승리할 것입니다. 이 발전 개념에는 후퇴나 쇠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천국의 그래프는 상승 직선을 그릴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승리하기까지 상승 직선을 그리면서 서서히 부상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도 더 이상 이 천국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계 곳곳에 이 천국을 상징하는 십자가와 교회건물이 있어서 누구나 오라고 손짓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지만, 천국 나무가 뻗어가야 할 공간과 시간이 겨자씨의 남은 성장을 재촉하지만, 예수의 비유는 그대로 적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다른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 겨자씨 비유도 그 당시에는 예언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가장 작은 겨자씨가 밭에 떨어지는 것으로 비유되었던 그 천국이 이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어떤 것보다도 더 큰 나무로 성장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십자가, 성경, 찬송가 그리고 이런 것들 주변에 어른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 천국의 흔적을 뚜렷이 보면서도 이것이 천국이라는 것을 혹은 천국과 단단히 결부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여전히 비밀에 쌓여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을 거부하고도 이천 년 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음 편히 살고 있습니다.

예수의 비유에 우리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예수와 그에게서 시작되는 천국에 극도의 거부감을 갖는 이 사람들도 그들이 비록 예수와 아무 관계도 맺지 않기를 원하지만 결국은 크게 자란 천국 나무의 그늘 아래 쉬며 더위를 식히고 노래를 부르며 등지를 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 점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도 그렇게 확인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란 믿음 안에서 예수를 인정하거나 불신으로 거부하는 양자택일의 역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천국 밖에서의 영원한 죽음 사이의 선택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예수께서 선택하시기를 원하는 길에 들어가며, 믿음을 통해 천국 나무의 한 작은 부분이 된 사람들은 나무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나 후 세대들에게 그들도 천국을 선택하도록, 그래서 천국의 일부가 되도록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선택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는 역사의 주체들인 것입니다.

2. 누룩 비유(33절)

누룩 비유는 겨자씨 비유와 내용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겨자씨 비유에서는 천국이 밭에 뿌려진 겨자씨에 비유된 것에 반해서 누룩 비유에서는 천국이 어떤 여자가 가루 속에 갖다 넣은 누룩(발효제)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겨자씨 비유는 천국의 성장과정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누룩 비유는 이 천국이 외부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비유는 누룩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가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누룩이 주는 변화로써 천국의 특징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누룩 비유를 통해서 천국은 거대하게 발전, 성장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거대한 힘을 행사하여 마침내 세상 전체를 정복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자가 누룩을 넣은 것처럼 이천여 년 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시작하신 그 천국이 마지막 순간까지 세계를 변화시키는 작업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누룩 덩이가 되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 가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밀가루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영향을 주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향한 기대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장차 누룩이 온 세상에 퍼지게 될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을 기초로 현재의 삶에 계속되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천국에 대한 또 다른 부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특히 이 두 비유는 천국의 소망적인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천여 년 전에 갈릴리에서 겨자씨와 같이 아주 미미한 몸짓으로 시작한 천국이 거대한 나무로 성장해서 오늘 우리 곁에 있는 것과, 앞으로도 더 성장해서 온 세상을 가득 덮게 될 누룩과 같은 천국! 이것이 이 두 비유를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은 저절로 자라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을 전파하셨습니다. 비록 비유라는 그릇에 담아서 귀 있는 자들만이 들을 수 있도록 전하셨지만 말입니다. 주님은 천국이 시작되었고, 그 속에 공존하고 있는 알곡과 가라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의 유일한 구분 점은 열매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인이 기대하는 삶이 열매 맺는 삶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무는 서서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커갑니다. 훗날에는 다른 모든 나무보다 커지게 될 것이며 온 세상에 가득한 누룩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 하나님의 나라를 성장시키는 일, 퍼트리는 일이 바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처음에 주님은 열두 제자에게 그 일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그 일을 성실히 감당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수 없는 일꾼들이 이 나무를 성장시키는 일에 생명을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나무는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이 천국이라는 나무를 성장시켜야 하는 일꾼들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오늘도 기억하고 최선을 다해서 나무에 거름을 주고 가꾸려는 선한 노력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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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천국에 관해 말씀하신다. 이 비유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과 장차 일어날 일에 관한 비밀을 밝혀주는 중요한 말씀이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31-32)

이 비유에서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 밭은 이 세상을 말하고, 씨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뿌려진 씨는 겨자씨이다. 겨자씨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작은 씨앗이다. 물론 이 세상에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앗이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겨자씨는 작은 것의 상징이라는 의미이다. 겨자씨는 어떤 특성이 있는가? 작지만 톡쏘는 특성이 있는데, 곧 자극적이고 반향이 크다는 점이 이 비유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게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예수님은 이 비유 말씀이 어떻게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과 그 공동체 곧 교회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끼치는가의 비밀을 밝혀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1세기 지금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 말의 어원은 안디옥 사람들이 뭔가 모르지만 자기들 사는 것과는 다른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에 일어난 박해와 핍박을 피해 흩어진 이름없는 성도들이 모여 세워진 교회이다. 후에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더 복음 진리의 말씀사역이 흥왕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일부러 광고를 하지 않아도 그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전도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데 그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사는, 즉 행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서 부인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있다. 곧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오래 참고, 견디며, 성내지 아니하고, 복수하지 않고, 자기보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다. 결코 광고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이 있다. 항상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섬긴다. 이것이 겨자씨 비유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 작은 씨앗이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된다고 하신다. 겨자씨는 나무가 아니다. 나무로 자라지 않는다. 그러면 예수님이 식물에 대해서 잘 모르시고 하신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겨자씨가 나무가 된다고 하심은 이 씨앗의 비정상적인 성장을 말한다. 작고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과 그 교회가 큰 나무가 된 것이다. 이는 교회의 비정상적인 성장을 말해 준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에서 보여 주신대로 낮고 겸손한 자세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최첨병 그릇이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세상이 하는 것처럼 위에 서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새들이 비정상적으로 자란 나무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앞서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새를 언급하셨다. 딱딱한 길가에 떨어진 씨를 새가 와서 먹어버렸는데, 여기에서 새는 마귀라고 예수님이 그 비유 해석에서 말씀하셨다. 성경은 결코 새나 동물의 상징 등을, 서로 상반되게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사용한다. 많은 학자들이 이 부분을 교회가 처음에는 초대교회와 같이 작게 시작하였으나, 후에는 창대하게 되어 많은 영혼들이 그 안에서 쉼을 얻는 것으로 겨자씨 비유를 해석하였다. 나도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해석은 분명 잘못이다. 이 나무가 된 겨자씨는 비정상적인 성장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이 가지에 깃들이는 새는 곧 마귀가 교회내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앞서 거라지 비유 말씀에서도 이를 밝혀 주셨다. 교회 내에 알곡과 거라지가 함께 존재하는데, 거라지는 결국 마지막 날, 심판을 위해 단으로 묶여 불에 태워질 것이다.

겨자씨 비유 말씀에서 항상 낮은 자세, 겸손한 자세로, 우리 주님 다시 오는 그 날까지 겨자씨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길 기도한다. 예수님은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려 이 세상에 빛을 영원토록 비추신다. 지상 공생애동안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이 살면서, 가난한 자, 병든 자, 귀신에 고통하는 자, 무지와 불신으로 병든 자, 자기 죄도 모르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는 자,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드리셨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사,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삶을 누구든지 믿는 자마다 거저 나눠주고, 함께 즐거워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겨자씨의 비유



앞에서 씨부리는 농부의 비유는 교회의 내적 성장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겨자씨비유는 이 땅에 건설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외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마13:31절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Αλλην παραβολὴν παρέθηκεν αὐτοῖς, λέγων Another parable put he forth unto them, saying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또’는 ‘다른( ἄλλος different )’이란 뜻이다.

즉 앞의 비유와 다른 면에서의 비유를 의미하고 있다.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건설되어진다.

내적 교회의 능력과 외적 교회의 능력이 함께 이루어져간다.

좋은 밭에 뿌려진 좋은 씨는 100배 60배 30배 혹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데 인내함으로 열매를 맺는다.

이 열매는 썩어지고 쇠하여질 땅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보고에 쌓여질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떨어진 복음이 자라서 세워지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구속받은 의와 거룩한 삶과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맺어지는 열매는 절대로 육신적인 것이 아니다.

복음을 받은 성도들 가운데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이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세워진 성도가 곧 교회이며 성도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루는 것이다.

100배 60배 30배라는 배수는 하나님께서 각자 성도들에게 주신 달란트의 완전한 열매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00 60 30은 성도들이 받은 각각의 달란트에 대한 완전수이다.

예수님은 달란트비유에서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각각 받았다고 하셨는데 달란트는 받은 자들이 각각 열심이 일해서 배로 남겼는데 5달란트는 10달란트가 되었고 2달란트는 4달란트가 되었고 1달란트는 2달란트가 된다.

이 숫자는 물량적이며 수학적인 수가 아니라 완전한 열매 영혼구원의 열매를 의미한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마음에 받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뜻과 의를 따라 사는 자들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각각에 따라 주신 걸맞는 은사를 통해 전도의 열매를 맺는다.

구원받은 자가 복음을 전하여 다른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당사자들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3:7에서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했다.

겨자씨비유는 지상의 하나님나라의 다른 면을 말해주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양적인 면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겨자씨 한 알을 심었다.

이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인데 이것이 자라서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니까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이게 되었다.

겨자씨(σίναπι mustard)는 실제로 1-2미리정도 되는데 이보다 더 작은 씨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주님은 모든 씨보다 가장 작다( μικρότερος least )고 하셨다.

이것은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 가장 작은 씨라는 뜻이다.

왜 예수님은 천국비유에서 겨자씨를 생각하셨을까?

겨자씨가 그 당시 알려진대로 씨들중에 가장 작기도 하지면 그 성장세로 볼 때 다른 풀들보다 훨씬 잘 자라고 크게 자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겨자씨가 자란 후에는 어떤 채소( λάχανον herb)보다 더 크다(μείζων greater 혹은 greatest )고 했다.

여기서 채소라고 한 것은 겨자가 한해살이또는 이년초 풀이라는 뜻이다.

톰슨박사는 말한다 “나는 아카르의 풍요로운 평야에서 말 혹은 말탄사람의 키만큼 높이 자란 이 식물을 본적이 있다. 비유에 나오는 겨자나무는 아마도 가버나움 근처 타비가 이 지점에서 자란 것을 이전 여행에서 우연히 보았다. 우리 주님의 시대에 그것이 재배되어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거대한 크기로 자랐고 많은 가지들을 뻗치고 그래서 공중의 새들이 충분히 그 가지들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다년생이어서 상당한 나무로 자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도시에는 전설이 있는데 이것이 아주 커서 남자가 기어올라갈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붉은 후추덤불들이 해마다 키큰관목으로 자라고 피마자씨들이 버드나무나 포플라와 같이 다마스커스주변 시내에 줄지어 서있는 것을 본후에 나는 금새 우리주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큰 겨자나무의 존재를 충분히 확신할 수 있었다.”

R. Simeon ben Chelphetha는 말한다.

“시킨에 세개의 가지가 달린 겨자나무가 있었는데 그것중에 하나를 꺽어서 사람들은 토기장이의 초막위에 덮었다. 그리고 그 가지안에서 상당량의 겨자씨를 발견했다.나는 내 밭에 겨자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위로 올라갔다”.

겨자나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자료들이 있는데 한해살이풀로써 유채꽃처럼 피고 잘 자라면 3미터까지 자랄 수 있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다년생으로 자라서 나무모양을 이루어 새들이 깃들이고 사람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자란다고 한다.

우리 주님께서 보신 겨자나무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한해살이로 유채꽃보다 좀 큰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무같이 크고 튼튼하게 자란 것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예수님은 이 겨자씨가 처음에는 풀이었다가 자라서 나무가 되어 새들이 둥지를 틀고 거할 만큼 튼튼한 나무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겨자씨는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한다.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때 매우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임하셨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연한 순( יוֹנֵק tender plant, twig )같다고 했다.

마치 아주 작고 힘없는 겨자싹과 같이 우리 주님인 이 세상에 오셨다.

왜 우리 주님은 백향목처럼 소나무처럼 강하고 멋있는 종자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고 겨자씨처럼 보잘것없고 아주 약한 종자로 오셨을까?

귀족이나 왕족처럼 권세와 능력을 가진 가문에 오시지 않고 아주 가난하고 힘없는 목수쟁이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오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세상을 구원하시고 죄인들을 죄악에서 건져내시는 일은 세상의 힘이나 권력 또는 가문이나 우월한 출생신분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에 세상의 힘을 전혀 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육신적으로 모든 씨보다 더 작은 겨자씨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프랑스의 영걸 나폴레옹이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에서 파란 만장한 생애를 마치면서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고 한다. “나와 시저는 칼로 세상을 정복했다. 그러나 그 제국은 영원히 멸망해버렸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병졸 하나 없이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했다. 그리고 그의 제국은 아직도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부하는 온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우리 주님은 무력도 권세도 지식과 경험도 세상의 어떤 이점도 빌리지 않고 오직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셨고 수많은 영혼들을 사망에서 지옥에서 건져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겨자씨로 비유되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적인 연약함과 미미함이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고 가장 비천하고 힘없고 가련하게 오셨지만 결국 온 세상을 다 감싸고 수많은 영혼들을 굴복시키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슥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일은 오직 성령으로만 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가장 작은 겨자씨를 말씀하셨다.

겨자씨는 작지만 생명력이 있다.,

아무리 작은 씨라도 생명이 있으면 강한 힘이 있고 자랄 수 있다.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한알의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의미한다.

이 겨자씨는 이 세상에서 한정된 생명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 영원한 세상으로 가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즉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은 육신의 생명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세상의 권세나 힘이나 지식이나 어떤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믿음으로 일어나는 기적은 세상의 과학이나 돈이나 권력이나 어떤 초능력으로 되어질 수 있는 물리적이나 눈속임이 아니라 이 세상을 초월한 기적을 말한다.

겨자씨믿음의 기적은 바로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멸망으로 가는 인생이 생명을 얻어 하나님앞으로 가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심판에서 자유함으로 가는 인간세상에서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기적이다.

겨자씨믿음의 기적은 모든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것을 초월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역사이다.

겨자씨믿음은 온 세상에 편만하게 된다.

나사렛의 작은 마을로 오신 예수님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소아시아 유럽과 로마, 로마를 통해 온 세계로 퍼져나가서 모든 시대의 시대정신이 되어 버렸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너머 이방인에게 전파된 후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사상 문학 지식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주요한 주제가 되었고 선의든 악의든 모든 시대를 초월한 화두가 되었다.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제외하고서는 세계가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믿음이 변질되어서 그리스도의 사상이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친그리스도든지 반그리스도든지 세상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계속 흘러가게 된다.

다니엘은 겨자씨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에 편만하시게 될 것은 느브갓네살 왕의 환상을 통해 보았다.

단 2: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산에서 뜨인( cut out ) 돌이란 채석장에서 사람이 기계나 도구를 이용하여 잘라낸 돌이 아니라 사람의 손이 전혀 작용하지 않고 큰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돌이라는 뜻이다.

산에서 뜨인 돌은 곧 사람의 혈통을 통해 오지 않고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뜨인 돌이 온세상의 권력과 나라를 부수고 영원히 서게될 하나님의 나라 곧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인 것이다.

겨자나무아래에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2)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4:32)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13:19)

공중의 새들을 천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교회안에 천사들이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다.

히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마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믿는 성도들에게 천사들을 붙여서 봉사하고 섬기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천사를 그의 일군으로 사자로 사용하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길가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셨다.

앞의 비유에서 새를 예수님이 마귀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보면 겨자나무아래에 깃들이는 공중의 새는 마귀가 아닐까 한다.

어떤 주석가에 의하여 새를 천사라고 볼 때 천사는 의롭고 선한 천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천사 즉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있다.

나무보다 큰 겨자나무에 깃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성령을 따라 역사하는 거룩한 천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사자인 악한 영도 깃들인다.

그래서 주님은 공중의 새들이 라고 말씀했다.

공중( οὐρανός )은 천사들의 활동무대이기도 하지만 악한 영들의 활동무대이기도 하다.

작은 겨자씨인 예수님으로 시작한 지상교회는 점점 장대하게 커져서 로마제국을 지배할 정도가 되었고 이제는 세계를 지배하는 기독교사상이 되었다.

그런데 외적으로 커진 그리스도의 교회안에 악한 마귀의 사자들이 드나들면서 순수한 그리스도의 믿음을 세상권력과 부 문화 정치와 혼합된 그리스도사상으로 변질케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실 때 다 아셨지만 듣는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겨자씨로 시작하신 예수님의 복음이 2000년을 지나 온세상을 뒤덮어 카톨릭과 개신교를 통해 엄청난 교세를 자랑하고 있는 현시대에 겨자나무에 깃들인 공중의 새들이 단지 거룩한 천사나 거룩한 성도들만이 아니라 죄와 악에 오염된 마귀의 사자들과 그의 추종자들이 함께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대한 겨자나무교회안에 있는 자들을 구별하기 위해 마지막때 환난과 시련을 주시는 것이다.

진실한 겨자씨믿음은 불시험가운데에서 오히려 정금같은 예수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순종함으로 나타나고 그저 겨자나무에 거하는 거짓된 자들은 불시험가운데 그 거짓이 다 드러나서 결국 예수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배신하여 스스로 정죄함을 당하게 된다.

겨자씨(mustard)씨 비유가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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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는 배추과의 일년생 또는 이년생 풀로서, 씨가 많고 향기롭기 때문에 양념과 약재로 사용되며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 이용된다. 겨자씨는 다른 모든 씨앗 보다 작은 것(32절)이지만 생장력(生長力)이 대단하여 보통 1m 정도로 크게 자라며, 특히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약 3m 가량 자라 마치 나무처럼 무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 중에는 그것을 정원수로 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겨자씨를 예수께서 천국에 비유하신 것은 겨자씨가 지니는 몇 가지 특성 때문이다.

(1) 은밀성. 겨자씨의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성장해 나간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확연히 노출되지 않은채 조용히 성장해 간다.

(2) 확장성. 겨자씨와 마찬가지로 천국이 비록 현재는 미약하고 보잘 것 없게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나중은 창대해질 것이다.

(3) 변화성. 겨자씨는 크기에 반해 놀랄만한 변화를 남긴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그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아주 작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크고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시작과 성숙한 끝맺음의 유기적 결합으로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고대하는 바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크고 웅장하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예수의 사역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임하였다. 또한 살아있는 씨앗처럼 생명력을 가진 복음의 결과로서의 교회는 예수 – 12제자 – 120문도에 의해서 발전되어 현재는 온 인류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큰 나무로 성장하게 되었다.

겨자씨

•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 맞나요?

예수께서 비유로 사용하신 검은 겨자씨(sinapis nigra)는 비교급 ‘미크로테론’이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가장 작은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 ‘보다 작은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당시 유대 격언에서는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할 때 ‘겨자씨 만큼 작은 것’이라고 말했을 만큼 그 크기는 매우 작은 것으로 공동 인식하고 있었다. 더욱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씨의 크기가 아니라 씨의 결과인 나무의 크기이다.

• 공중의 새들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겔 31:6과 단 4:12에서의 ‘공중에 나는 새’는 하늘까지 닿은 나무로 상징된 ‘대제국 앗수르’의 속국들과 ‘대제국 바벧론’의 속국들, 곧 제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모여드는 많은 나라와 그 민족들을 가리킨다.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 거하였었느니라”(겔 31:6)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단 4:12)

그러나 겨자씨 비유에서의 공중의 새들은 겨자 나무, 곧 천국의 실체가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가를 보여 주는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영적으로 좀더 확대 해석하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도 볼 수 있다. 즉 고통에 지쳐 평안과 안식을 갈망하며 쉴만한 곳을 찾는 인생들. 이들은 참 포도나무요 생명 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깃들이느니라(카타스케노오κατασκηνόω)

천막을 가리키는 말 ‘스케네(σκηνή)’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살다’ ‘거주하다’의 뜻을 나타내는 ‘스케노오(σκηνόω)’와 ‘아래’, ‘밑’을 가리키는 전치사인 ‘카타(κατά)’ 의 합성어로서, ‘장막을 세우다’, ‘장막에 들어가다’, ‘진을 치다’의 의미로 민 14:30; 신 33:12; 시 16:9에 의하면 안전하고도 영속적인 거처를 마련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행 2:25에 인용된 시 16:8에 의하면 부활 이후의 삶을 가리키기도 한다. 겨자씨 비유에서의 새의 깃들임도 역시 새들이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날아가 버리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방울새와 홍방울새와 같이 겨자나무에 떼를 지어 지속적으로 깃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신 33:12)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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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9.겨자씨 비유가 보여주는 천국

겨자씨 비유가 보여주는 천국

(눅 13:18)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눅 13:19)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여러분 천국 가고 싶으세요? 세상이 너무 좋은 분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천국을 사모하고 가고싶어한다. 우리가 가고 싶어하는 천국은 공간을 가진 내세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도 이와같이 말씀하셨다.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런데 주님은 이 천국에 대해서 달리 말씀하신적이 있으시다.

(눅 17: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천국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마음으로 천국을 경험할 수가 있다라는 말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그의 나라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라고 하심으로 세상나라와 구분되는 영적인 나라 임을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서도 그 마음천국이 우리 마음속에 임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셨다.

(마 12: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9) …이 말씀은 성령이 임하면 천국을 경험하게 되는 데 그때는 귀신도 쫓겨 나간다고 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 마음천국이 우리속에 임할 때 느낌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롬 14: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오늘 저는 그 마음천국을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수님의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눅 13:18)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눅 13:19)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주님은 그 마음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인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서두에 “ 그러므로” 란 접속사를 사용하셨다. 그것은 겨자씨비유 전에 나오는 사건 즉 귀신들려 18년동안 신체의 아픔때문에 고통당한 여인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치유이야기를 참고하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말씀드렸던 대로 그 여인은 귀신들려 고생한 척수병환자로 몸의 위 아래가 완전히 접혀있는 상태로 18년을 보낸 여인이다. 그런데 가끔이 아니라 18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했을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녀를 불러 고쳐 주셨다.

그 사건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예수님의 관심은 귀신에게 묶였던 자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는 것이다. 정말 육체적으로 힘든 자가 고침을 받는 것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사탄에게 묶여있는 자들이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고 또한 방종같은 잘못된 자유에서 벗어나서 말씀과 계명을 지킴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눅 13:18)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눅 13:19)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하셨다.

그것은 18년동안 귀신에 묶여서 고통당한 여인이 고침과 해방을 얻은 것과 오늘 겨자씨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공통점은 나아가 우리가 이 땅위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오늘 그것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천국은 그 시작이 미미한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겨자씨를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으로 여긴다. 겨자씨는 지름이 겨우 1-2mm 밖에 안 되는 흑갈색 씨앗이다. 그래서 이 겨자씨는 너무나 보잘 것 없어 그 누구도 귀히 여기지도 관심가지지도 않는다는 측면에서 18년동안 귀신들려 곱추병을 않던 여인과 동일하다. 겨자씨는 누구도 관심 갖지도 않을만큼 지극히 작은 씨앗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로마의 엄청난 힘을 이길 더 엄청난 힘으로 기대하였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자,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드디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울 때가 되었다 생각한 것이다. 로마도 해결하지 못하는 배고픔, 떡의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은 씨앗’이라고 일축하신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큰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그렇게 소리없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왕궁이나 부자 집에서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태어나지 않았다. 구유에 뉘어졌다. 아버지는 목수였으며, 초라하고 가난한 집에서 자라셨다. 그가 태어나신 곳은 유대 작은 마을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의 태속에 들어갈 만큼 낮아지시고 작아지셔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 같이, 그 예수님이 당신의 대업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힘과 정복의 상징인 말을 타고 들어오지 않으시고, ‘낮아짐과 작음’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오셨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작게 보잘것이 없이 시작된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데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에서는 아예 가난한 자가 복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천국은 가난한 마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 겸손한 마음에서 천국은 경험되는 것이다. 결국 겨자씨 비유는 우리에게 마음이 가난해지라는 것이다. ‘작은 것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작은 것에 주목하셨다. 과부가 헌금한 엽전 두 닢을 칭찬하셨다. 소자에게 베푼 냉수 한 잔의 상급을 잃지 않겠다고 하셨다.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축복하시고 이 어린아이 같은 자라야 천국에서 큰 자라고도 하셨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겨자씨 속에서 천국을 보셨다. 우리도 작은 것을 작게 보지 말아야 한다. 위대한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결국 주님이 겨자씨비유와 18년동안 고통당하다가 회복된 여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마음이 작고 가난하고 겸손하면 천국을 경함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2)우리가 이 땅위에서 마음천국을 경험 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겨자씨를 심었던 것처럼, 귀신들려 18년동안 고통당하였던 여인이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순종하였던 것처럼 겨자씨 되시는 예수님을 붙드는 것이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가 심겨지면 불과 1-2년 내에 무려 4-5미터가 되는 큰 나무가 된다. 가히 폭발적인 성장력이다. 수천, 수만 배로 성장이다. 그것은 겨자씨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수천년된 애굽의 피라미드에서 나온 씨앗을 심었을때에 싹이 나고 잎이 돋은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겨자씨가 무엇인가? 겨자씨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도 겉으로 볼 때는 겨자씨처럼 작다고 예언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 이름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는 말씀대로 예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구원을 받는다. 지옥 갈 사람이 천국으로 옮겨진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우리도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이름이 어디 있나? 예수 이름 말고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이 없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하게 보일 찌라도 예수 이름의 능력은 대단한 것이다. 귀신과 질병이 예수 이름만 들어도 기겁을 하고 도망간다.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겨자씨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났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하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말했다.

(행 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리고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겨자씨가 그 속에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품고 살다보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는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자란다. 천국은 갑자기 자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오늘 갑자기 방언을 하고 기가 막힌 은혜 속을 지나면 그 다음 날 천사가 되는 줄 안다. 그럴까? 믿음은 그렇게 자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은 보이지 않게 계속적으로 내안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장은 거저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갖다심은 ’후를 통과한다. 심겨진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심겨진다는 것은 썩어 없어진다는 것이다. 즉, ‘희생과 섬김’을 통하여 성장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요12:24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비록 미미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소리없는 섬김이, 희생이 뒤따를 때 성장하고 확산된다. 이게 진짜 성장이다.

성장하려면 먼저 자기가 죽어야 한다. 씨가 땅에 심기워야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은 다스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다. 아니 죽으러 오셨다. 그래서 처음부터 화려하고 인기있는 곳이 아니라, 이름없는 땅 유대 베들레렘에서 태어나셨고, 나사렛에서 그리고 갈릴리에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제자들도 학벌도 지위도 없는 어부들이었고, 숫자도 많지 않았다. 예수님의 공생애도 그러하셨다. 그분은 고관대작을 만나지 않고, 소외받고 외롭고 고통받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작은 모습 하나 하나가 구석 구석에서 ‘소리없이’ ‘겸손히’ 이루어지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성장이다. 이것이 교회의 내공이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은 얼마나 크냐가 얼마나 많이가 아니다.

마12:19-20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고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 천국의 ‘성장’이다. 소리없는 헌신과 섬김을 통해 예수님 마음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변화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말라. 스스로를 기다려줘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내면을 주님께 맞출 때 우리는 성장하는 것이다.

3) 마지막 세 번째는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그 천국을 경험하고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눅 13: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작은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로 자라나 그늘을 마련해주고 가지를 내어서 수많은 새들을 보호할 수 있는 은신처를 제공하듯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을 품을 만큼 넉넉한 나라이다. 예수님은 큰 분이셨다. 그분을 만난 사람마다 살아났다. 그분을 통해 사람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 그분을 만나는 사람마다 결박과 묶임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다. 그분은 모든 인생의 구원의 그늘이 되어 주셨다. 모든 인생을 덮을 수 있는 넉넉함이 그분에게 있었던 것이다. 생명이 있으면 안아 줄 수 있다. 생명이 있으면 이해하고 받아주고 용서해 준다.

그래서 천국은 좁은 곳, 옹졸한 곳, 자기만의 세계가 아니다. 귀신들려 18년동안 고통당하던 여인도 관심가져 주시고 받아 주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든지 본인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과거를 불문하고 그들을 받아 주시는 것이다.

교회안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교회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이어서, 생각이상으로 다양하고 복잡하다. 어떤 일에 대한 생각도, 처리하는 스타일도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는 섬김의 세상이다. 강한 자가 약자를 섬기고 배운분이 모르시는 분들을 섬기고 가진 분이 갖지못한 분을 섬기는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나 품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때 교회는 천국이 되는 것이다. 천국은 ‘포용’하는 나라이다. 한번 사는 인생, 찌질하게 살지 않고 주님처럼 멋있게 ‘통 크게’ 살아야 한다.

지금 여러분 중에, 내가 하는 일은 너무 보잘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 우리가 주님을 보시고 그분처럼 살아간다고 하면 반드시 우리는 우리의 사역에서 많은 사람을 살리는 열매를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주님이 다스리시기에 자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광고를 보니 ‘전도대회 1등 상품이 소형승용자 1대, 그밖에 인원에 따라 김치냉장고, 컴퓨터, 대형 텔레비전, 자전거’ 같은 경품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사진에 보니 그 교회 로비에 소형승용차가 떡하니 전시되어 있었다.

얼마나 성도들이 전도를 하지 않으면 경품까지 내걸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백화점이나 할인마트에서 특별행사를 할 때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라 마음이 씁쓸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1년에 수백명을 교회로 인도했다고 한들 그분들 중에 몇 명이나 계속 신앙생활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오히려 그렇게 교회에 나온 분들이 교회에 대한 안 좋은 반감만 품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정말 귀한 일이다. 하지만 경품이 탐나거나 ‘전도왕’이라는 호칭을 얻고 싶어서 하는 전도는 순수한 전도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그 사랑에 감격하여 부득불 내가 전도하지 않고는 어찌할 수 없는 빚진 마음으로 전도를 한다면 전도를 해놓고도 실족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옳은 전도는 낙엽을 갈쿠리로 긁어모으듯 무차별 대량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삭 줍듯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한 사람 한 사람 분명하게 거듭나도록 복음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철저히 회개시키고 분명하고 확실한 믿음의 사람을 만드는 조금 느리더라도 그게 백 번 옳다.

어떤 나이 많은 전도사님이 기독교서점에서 많은 전도지를 주문했다. 그러면서 점원에게 힘없이 말했다. “내가 오늘 전도지를 사가는 것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제 너무 늙어서 전도지를 들고 다니며 전도를 할 만큼 기력이 남아있질 않아요.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전도지를 나누어주었는데 아직까지 내가 준 전도지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람을 한사람도 못 만났어요. 혹이나 그동안 헛수고만 한 것은 아닌지…그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때, 서점의 한쪽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어떤 젊은이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나이 많은 전도사님을 유심히 보더니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저..노인께서는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노인을 잘 압니다. 10년 전 6월 25일 오후 6시 30분쯤 노인께서 안산역 앞에서 저에게 전도지를 주셨지요. 전 그 전도지를 읽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제 가족들도 모두 저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제 동생은 선교사가 되어 인도에 가 있습니다. 저는 방금 노인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노인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를 이곳으로 보내신 것은 아마 노인이 나눠준 전도지 중 적어도 한 장을 어떻게 축복하셨는가를 알려주시려고 하셨는가 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은 보잘 것 없어보이는 이들 한사람 한사람을 귀히 여기고 그들을 섬기고 사랑할 때에 그들이 변화되고 나아가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이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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